올해도 역시 방학은 주인을 잃었다. 전국이 39도로 펄펄 끓던 8월 초에도 이른 아침부터 버스정류장에는 방학 전과 똑같이 학교 버스를 가다리는 학생들로 넘쳤다. 그들의 영혼 없는 표정을 보고 당황한 건 버스였다. 마치 그들의 영혼을 빼앗은 것이 자기인 양 학교 가는 버스는 힘이 없었다.
버스는 학생들을 의미 없는 방학 보충수업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입시 경쟁이 없는, 그래서 사람 사는 방법에 대해서 배우는 참교육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없는 지 고민했다. 버스 속도는 그 고민과 반비례했다.
영혼 없는 학생들의 표정을 읽은 신호등은 학생들의 영혼을 앗아가는 지금과 같은 교육 시스템은 멈춰야 한다고 학교와 가정, 그리고 정부에 계속 경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명문대학교에 눈이 먼 부모와 교사들은 그 메시지를 무시하고 버스를 재촉하거나 가속페달을 직접 밟았다.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커지는 학생들의 한숨 소리는 버스를 공중부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녀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믿는 어른들은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학교 가는 버스는 학생들을 학교 앞에 내려줬다. 그러면 학교는 진공청소기처럼 학생들을 흡입했다. 그리고 친절하게 종까지 치면서 학생들의 영혼을 돈 세탁(洗濯)하듯 세탁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제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이 나라 교육 시스템 안에만 들어가면 단거리 육상선수들이 기록 경쟁하듯 빠르게 변질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라는 공장은 지어진 지가 반세기가 넘었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매너리즘에 깊이 빠져 있으며, 생산 라인은 공장설립 후 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 새로운 것을 투입하니 공장 안은 혼돈만 가득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시스템에 맞추는 쉬운 방법을 택했기에 변질은 당연한 것이다.
이 나라 교육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가 있다. 그것은 진화(進化)다. 그런데 동음이의어 중 진화(鎭火)는 교육과 매우 밀접하다. 교육 수장이라는 자들은 교육을 진화(進化)가 아닌 진화(鎭火)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임기 내에 뭔가 실적을 올리기 위해 무리수를 둔 진화(鎭火)를 하다 보니 문제는 더 꼬이기만 한다. 그것이 수십 년 동안 반복되다보니 이제 교육 문제는 진화(鎭火) 자체가 불가능하게 돼 버렸다. 그런데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검증되지 않은 이상한 방법으로 진화를 하겠다니 답답할 노릇이다. 무모한 진화가 교육의 본질까지 태워버렸다는 것을 당사자들은 알기나 할까. 교육을 망치고 있는 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떠들어대는 `정치 교육인`들인데, 왜 우리 학생들이 시지프스의 비극적인 운명을 져야 하는 걸까. 곧 개학이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데 과연 이 나라 학교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시지프스의 바위보다 더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학교로 향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더 이상 희망 고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이 나라에는 참 교육 같은 것은 없다고 교육 사망 선언을 하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참고 시험을 위한 지식들을 외우라고, 그래서 줄 세우기 입시 경쟁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으라고, 그러면 어쩌면 성공할 수도 있다고.
블랙아웃(Blackout)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대규모 정전(停電) 사태, 숨을 참다가 다급해진 다이버가 의식을 잃는 현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분명한 건 지금처럼 `정치 교육인`들이 계속 교육 판을 흔들면 곧 교육 블랙아웃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전에 국민들이 `정치인 교육 접근 금지법`이라도 발의해서라도 교육에서 정치를 떼어 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