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 배짱 한번 두둑하다 / (중략) /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 도무지 없다 //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하략)” (박지웅 시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
덧없음이 이와 같을까. 벌써 방학이다.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빠르다. 입학식 가정통신문을 쓴 지가 엊그제 같은데, 학생들은 여름방학 가정통신문을 들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1학기 마침 종례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시였지만 학생들은 시보다는 자신들을 터미널로 실어다 줄 버스를 더 간절히 기다렸다. 그리고 매미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주고는 허물을 벗듯 학교를 벗어났다. 학교를 박차고 떠나는 학생들의 모습을 박지웅 시인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학생들이야말로 이 나라의 전정한 희망의 불꽃이라고. 우리는 그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 불꽃이 지금에서 다음으로, 다음에서 그 다음으로 영원히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매미가 우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구혼(求婚)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그래서 대도시의 매미들은 인간의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기 위해 목청이 터져라 우는 것이다. 구혼이라는 분명한 의미는 나무의 멱살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는 힘을 매미에게 줬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밝음에 대한 간절함이 만들어 낸 매미만의 DNA다.
그런데 이 나라 학생들은 어떤가. 매미처럼 나무의 멱살을 부여잡고 세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를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교과와 교사에 따라 다르지만, 이 나라 교실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나라 교육은 학생들을 우는 매미로 만들지 못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세상을 포기하는 방법을 배웠다. 많은 학생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책상에 납작 엎드려 울지 않는 매미가 되었다. 선생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의 학습권을 위해 그것을 묵인했다. 매미와 학생들! 매미는 나무에 붙어 있고, 학생들은 책상에 붙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매미는 힘이 있고, 학생들은 힘이 없다. 그 이유는 뭘까. 그것은 매미가 나무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알 수 있다. 매미는 7년이라는 어둠의 시간 속에서 밝은 삶에 대한 끝없는 꿈을 꿨다. 그 꿈이 간절함이 되고, 간절함은 희망이 되어 어둠을 뚫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매미는 스스로 어둠을 헤치고 그 무거운 허물을 이끌고 나무를 올랐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보다 더 힘든 허물을 찢고 나왔다. 그 힘으로 나무의 멱살을 잡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어떤가. 과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또 간절함이라는 것이 있을까? 물론 없다. 그것은 참을성 없는, 그리고 학생들을 자신들의 대리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어른들 때문이다. 어른들은 말한다. 자신들은 쓸 거 안 쓰고 모든 것을 다 해 줬는데 정말 이해가 안 된다고. 그런 어른들에게 묻고 싶다. 그것을 학생들이 원했느냐고.
방학이다. 그런데 방학이 주인을 잃은 지 오래다. 명문대학교를 위해 초등학생부터 매미 소리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없이 학교와 학원에서 힘을 빼고 있다. 방학이 주인을 찾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학생들도 스스로 나무에 올라 나무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이번 방학부터 학생들을 의미 없는 학교 보충수업과 마지못해 가는 학원 수업에서 해방시켜 주자. 그리고 매미와 소통할 수 있는 자연 속 매미 학교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