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을 받은 박해정 시인의 동시집 `넌 어느 지구에 사니?`를 읽고 한동안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고 익숙한 분위기였다. 그러다 불현듯,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랬다. 박 시인의 동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었다.
두메산골에 살던 유년기에 외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수많은 옛이야기들이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서 되살아났다. 그동안 사느라 바빠서 잊고 있었던 그리운 외할머니의 음성과 손길이 시인의 동시 `넌 어느 지구에 사니?`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 옛날의 외할머니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느낌이었다. 박 시인이 혹시라도 칠순이나 팔순쯤 되는 할머니 시인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이런 예외적인 개성은 어디서 나온 걸까? 박 시인의 말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아무리 양동마을이라도 부엌은 대부분 현대식으로 꾸며져 있어요. 그런데도 저는 부엌에 아궁이가 있는 집에 살게 되었어요. 그 앞에 서니까 저절로 어릴 때 부르던 동요가 생각났어요. “엄마아, 엄마아, 엉덩이가 뜨거워.” 하는 노랫소리가 귓전에 맴돌고, 그래, 조선 시대라고 생각하고 한번 살아 보자, 라고 맘먹었을 뿐인데 신기하게 옛이야기가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엄마랑 호랑이랑 떡이랑` `신기동 아줌마`같은 옛이야기에서 시작한 시도 쓸 수 있었어요.”
박해정 시인이 사는 곳은 경주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은 2010년 7월 31일 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의 씨족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에 형성되어 조선후기에는 전체 마을의 약 80%를 차지하는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바로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은 종택, 살림집, 서원과 서당, 농경지와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의례, 놀이, 예술품 등 수많은 정신적 유산의 보고이다. 유서 깊은 500년 조선의 마을, 양동마을에 바로 박해정 시인이 살고 있다.
유서 깊은 500년 조선의 마을, 양동마을에서, 조선 시대라고 생각하며 사는, 조선 시대에서 온 박해정 시인의 동시를 지금 만나보자.
“조선오이는/ 까칠까칠하게 살아 있고/ 조선호박은/ 아예 엉덩이 퍼질러 앉아/ 큰소리 떵떵 치고/ 조선간장은/ 슈퍼에 진을 치고 있어.// 조선 팔도에서/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어떻게 조선이 사라지겠어?”// (`아직 조선은 사라지지 않았어`)
“장사한 지 백 년이 되었다는/ 우리 동네 백년점방/ 문을 닫고 어둑해지면/ 그 옆에 착 붙은 버드나무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톱을 디밀며/ 흐흐흐, 난 더 오래 살았다!/ 이렇게 외치는 거 있지.”//(`백년점방`)
박해정 시인은 2015년 `동시마중` 5·6월호를 통해 등단했다. 박 시인은 아이들이 커가면서 서울살이를 접고 경주 양동마을로 내려왔다고 한다. 양동마을에는 수많은 조선 시대의 양반 가옥과 초가 160호가 모여 있다. 500년이 넘은 양동마을 집집마다 얼마나 많은 사연과 이야기가 가 켜켜이 쌓여 있을까? 박해정 시인은 유서 깊은 양동마을의 이웃들과 삶을 공유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다듬고, 동시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조선오이`, `조선호박`, `조선간장`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 `아직 조선은 사라지지 않았어` 라는 주장은 유효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E.H. 카는 말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에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해석과 상호 작용의 산물이란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조선`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더욱이 시인의 삶의 터전인 양동마을은 수많은 옛이야기를 간직한 동시의 곳간이다. 밤마다 버드나무가 머리를 풀어헤치며, 손톱을 디밀며 “흐흐흐, 난 더 오래 살았다!” 라는 외침을 들을 수 있는 `백년점방`은 양동마을이 아니면 쉽게 얻기 어려운 동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