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동물원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프리카를 흉내낸 인공 아프리카, 북극을 흉내낸 가짜 북극 등 동물원은 모방 세계다. 이 모방 세계 안에서 동물들은 유토피아와 가짜 유토피아 사이의 혼란을 겪는다.
온대기후 한국 땅에 갇혀 지내는 북극곰이 비참해 보인다. 환경 자체가 폭력이며, 생존이 곧 지옥 아닐까. 타고난 기질, 개성이 어떻든 간에 정해진 환경에 무조건 적응해야 하는 곳이 동물원이라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공 얼음 위에서 어떤 북극곰은 여기가 북극이라고 믿지만, 다른 북극곰은 북극이 아니라는 걸 안다. 가짜 유토피아를 유토피아인 양 착각하고 살거나, 유토피아가 아닌 걸 알면서도 그냥 현실을 수용하며 사는 것이다.
인간이 뭐 대단히 지혜롭지도 않은 것 같다. `자유`, `기회`, `복지`, `편리`, `안보`, `안전` 같은 말들이 인공 나무와 호수, 얼음 역할을 하며 허상의 유토피아를 이루고 있다. 그것들은 있으면서 없고,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 같아도 몇몇 사람이 독차지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회를 살 만한 곳으로 철석같이 믿거나, 살 만한 곳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저 살아간다.
살 만한 곳이 아닌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믿는 태도는 상상임신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부재와 무능이 드러난 `국가`를 계속 좇으며 `새마을 운동` 같은 지나간 애국의 형식으로 이상과 허구의 간극을 견딘다. `중산층`, `내 집 장만`, `자수성가` 따위 소멸된 이상들을 여전히 바라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아무리 몸부림쳐봤자 구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는 그저 적응하며 사는 쪽이 덜 고생스럽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수저계급론`과 `헬조선`의 사회에서는 든든한 배경 없이 아무리 노력해도 기득권의 장벽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다. 취업, 연애, 결혼, 내 집 장만을 아예 포기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간다. 패배를 수용하고, 더 좋은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 없이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현실에 대한 맹목적 긍정이나 무기력한 패배적 수용 모두 싫다. 살 만한 곳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저 살아야 한다면, 기왕 즐거운 게 낫다. 요즘 나는 어떻게든 즐길거리를 찾아 오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주의로 살고 있다. 자꾸 그러다 보니 세상도 살만한 곳으로 느껴진다. 이 아이러니가 삶의 동력이다. 즐기기 위해 일하고, 일해서 얻은 대가로 즐긴다. 낚시를 하고, 여행을 간다. 이런 태도를 `욜로(YOLO)`라고 부른다. `인생은 한 번 뿐이다(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용어로 현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소비를 아끼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을 뜻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하는 존재가 아닌가”라고 묻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인간 체험의 가장 기본값인 `자기 자신`마저도 체험할 수 없게 한다. 입시와 취업의 지옥 경쟁, 고된 업무와 야근의 연속 가운데 여가라는 것은 아예 꿈꿀 수도 없는 팍팍한 현실은 구성원들에게 한 주체로서의 개인을 아예 포기시킨다. 요즘 `욜로족`이 급증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구조에 대한 반작용이다. 욜로족들은 노후 대비, 결혼, 저축, 봉사, 기부 등 미래 또는 타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거부하고 당장의 즐거움만을 추구한다.
지난 2014년, 어린이대공원 북극곰 `얼음이`가 30도 넘는 폭염에도 실내 우리로 들어가지 않다 죽었다. 현재 우리나라엔 두 마리의 북극곰이 남아있는데, `얼음이`와 비슷하게 죽을 것이다. 땡볕 아래 위태로운 얼음을 밟고 선 북극곰의 슬픈 눈을 떠올리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나는 다음 달에 러시아 이르쿠츠크로 간다. 바이칼 호숫가에 앉아 러시아 전통 꼬치구이인 샤슬릭과 함께 보드카를 마실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욜로족`이 되길 희망한다. 같이 놀 친구들이 있으면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