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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정

등록일 2017-03-20 02:01 게재일 2017-03-2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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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찬<br /><br />김천대 교수
▲ 김동찬 김천대 교수

로봇 다리 세진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양정숙씨는 한쪽 팔과 다리 장애를 입은 세진이를 입양한다. 가슴으로 세진이를 낳은 엄마 양정숙은 헌신적으로 양육한다. 세진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돕는다. 어느날 세진이가 수영을 하고 싶다 한다. 폐타이어 매달고 달리는 체력 훈련을 시킨다. 얼핏보면 아동 학대같이 보인다. 하지만 엄마 양정숙은 세진이가 강인함 속에 해내게 만든다. 세진이가 또 새로운 도전, 승마를 원한다. 집 팔아서 승마 시킨다. 물론 혹독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해낸다. 정의를 이룬 것이다.

헬렌 켈러는 하버드 박사가 된다. 7살 되기 전 헬렌 켈러는 망나니였다. 소리 지르고 물건 부수는 모난 아이였다. 그러한 그녀를 하버드 박사로 만든 스승 앤 설리번은 용납만 한 게 아니다. 매를 들었다. 헬렌 켈러가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강한 훈육으로 이기게 만들었다. 과거 앤 설리번도 정신 병동에 있던 시절이 있었다. 말도 안하고 폐쇄적 삶을 살았었다. 앤 설리번 또한 정신병동의 끈질긴 노 간호사의 사랑으로 세상 속에 나와 치유 받았다. 앤 설리번은 `상처입은 치유자`의 모습으로 똑같이 헬렌 켈러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값싼 동정이 정의도 아니고 공정함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값싼 감상주의로 공정을 깨지 말아야 한다. 약함에 머물게 하는 것이 정의는 아니다. 가난한 자를 동정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없게 해야 한다. 자립의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정의다. 세진 엄마와 앤 설리번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과 정의가 뭔지를 알 수 있다. 상황에 관계없이 공정해야 한다. `악인, 다수, 가난한 자` 앞에서도 언제나 공정해야 한다.

정의와 공정을 파괴하는 경우는, 첫째 악인의 편에 서는 경우이다. 악인 편에 서는 이유는 뭔가? 자기 이익 때문이다. 이익 없이 악인 편에 설 사람은 없다. 특히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한다.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한다. `김영란 법`의 취지가 뭔가? 부정 청탁이다. 부정 청탁이 통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돈이 목표가 되면, 선과 악은 의미가 없어지거나 약해진다. 그러다 무너진다.

두 번째로 다수의 힘에 밀리면 정의와 공정을 망각한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착각에 빠지면 소수를 지지하다가는 왕따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앞서게 된다. 50% 이상이 가진 견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못한다. 공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민심이 천심이라며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다수를 따라 악할 수 있다. 다수가 정답이 아니다.

20세기는 프로이트의 시대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가 뭔가? 한마디로 성욕이다. 자기가 느낀대로 마음껏 살라는 뜻이다. 억압 때문에 모든 병과 부작용이 나왔다는 말이다. 프로이트는 처제와 불륜을 저질렀다. 그걸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라 생각된다. 물론 마음은 편했을 거다. 눌림은 사라졌을 것이다. 근데 그게 정당한 것인가? 단지 죄일 뿐이다. 원하는 대로 하는 것, 다수의 길이 진리가 아니다. 진리가 진리다. 정답이 정답이다. 시대 트렌드를 따르지 말라. 오직 섭리의 말씀을 따르라. 이게 진리다.

정의와 공정을 위해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가난하니까, 약하니까 편파적으로 돕자는 정서적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힘과 권력이 정의가 아니듯, 약함과 가난도 정의가 될 수 없다. 옳은 게 옳은 거다. 약자 동정을 빌미로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이 있다. 이런게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과 선동은 안 된다. 정의와 공정이 자리를 잡은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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