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손학규씨가 정계은퇴를 선언했을 때, 언론인 김정남씨가 한 인터넷신문에 기고한 `손학규 정계은퇴를 보며 생각한다`라는 칼럼 중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손학규가 내세운 `저녁이 있는 삶`이 `시참(詩讖)`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과연 그가 `저녁이 있는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는 탄식이다.
`시참`의 사전적 의미는 “우연히 지은 시가 뒷일과 꼭 맞는 일”이다. `저녁이 있는 삶`을 내세웠던 손학규 자신이 만덕산으로 들어가 두해 동안 남녘의 저녁놀과 밥 짓는 연기, 밤 부엉이 우는 소리 가운데 살았으니, 정말 기가 막힌 시참이 된 셈이다.
시참이라는 면에서 보면 시 쓰기는 자기 운명의 섬뜩한 묵시록을 작성하는 일인 것 같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쓰고 정말 박제 되어버린 천재 이상이 떠오른다. 친일과 독재 찬양으로 얼룩질 삶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라고 선포하고는 정말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은 서정주는 또 어떤가. 기형도는 1989년 초에 발표한 시 `빈집`에서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고 쓰고는 얼마 뒤인 3월 7일, 심야영화가 상영되던 파고다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나무도마`라는 강렬한 시로 당선된 신기섭 시인은 등단 1년도 채 되지 않은 그해 12월 4일, 눈길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은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걸까. “옥상에 흰 눈이 쌓이고 있다. 눈이 많이 온다는데 새벽에 출장, 영천행. 무언지 모를 불길한 기분…. 옥상에 쌓이는 눈은 나 아니면 아무도 밟아줄 사람이 없는데”라는 독백이 비극적인 시참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시참에 대해 생각하며 새삼 말의 힘을 실감한다. `말하는 대로`라는 노래가 그저 단순한 대중가요로만 들리지 않는다. 말이 가진 강력한 힘을 믿는다면 타인에게 또 스스로에게 아무 말이나 막 던질 수가 없다. 지금도 아프리카 원시 부족에서는 주술이 유효하다. 언어를 통해 복과 저주를 기원하고, 병을 고치거나 자연재해를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말을 통해 생명이 창조되었다. 그때 언어는 대상을 묘사하고 수식하기 위한 외부적 장치가 아니라 대상을 직접 창조하고 진화시키는 내재적 힘이었다. 언어가 부여한 기질에 따라 생명들은 세상에서 살아나갔다. 그 언어를 로고스(logos), 원리와 법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창조론적 관점에서 만물의 탄생과 습성을 결정짓는 강력한 힘이다.
말은 힘이 세다. 말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습관들,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언어들이 나 또는 타인의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이는 말 대신 살리는 말,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의 말, 저주 말고 축복의 언어를 더 많이 써야 하는 이유다.
우환이 생겼다. 팔순 넘은 할머니께서 낙상을 입어 고관절이 골절되었다. 노인 고관절 골절은 치료 후에도 거동이 제한돼 합병증 위험이 큰 만큼 치명적이다. 나를 업어 키우고, 폐지 주워 교복을 사 입힌 할머니다. 평생 어두운 눈과 먹먹한 귀로 사셨다. 이제 눈은 보이지 않고 보청기 없이는 듣지 못한다. 몇 년 째 외출도 못했는데, 또 오랫동안 병원에 누워 계셔야 한다. 새해 복을 기원하는 덕담들의 은총으로부터 계속 소외될 수밖에 없다. 올해도 많은 분들이 내게 축복의 인사를 건네주신다. 감사하면서, 죄송한 요청이나 이번만은 나 대신 할머니에게 그 말의 힘을 전해주시라. 내 복 말고 할머니의 건강을 빌어주시길 부탁드린다. 말의 힘을 믿으면서, 나는 요즘 새벽기도에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