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팝아트의 선구자인 앤디 워홀(Andy Warhol)은 `현대미술`의 아이콘이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었던 그에게 붙은 `팝의 교황`, `팝의 디바` 등의 별칭들은 워홀이 끼친 미술사적 영향력을 여실히 대변한다. 그는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광고·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게 걸었던 보수진영의 기대가 흔들리고 있다. 한국정치의 신 지평을 열어낼 감동적인 `메시지`를 고대하는 국민들의 갈증을 채워주기에 그는 아직 역부족이다. 귀국 후 부리나케 여기저기 전국을 쫓아다니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그의 모습은 `기성정치` 행태 이미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구러 정치판 기류는 `문재인 대세론` 언저리에서 좌충우돌 중이다. 설을 지나면서 정치인들은 제각기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으로 포장해 민심을 전한다. 보수정치인들은 절대위기감에 빠진 보수민심이 정치인들의 용단을 요구하고 있음을 전한다. 진보정치인들은 `서둘러 탄핵을 매듭짓고, 빨리 정권교체 끝내라`는 것이 대략의 민심이라고 능갈을 섞는다.
탄핵소추 재판 중에 차기 대통령 선거전이 활활 타고 있는 희한한 정국 속에서 국민들의 일상은 그저 뒤숭숭할 따름이다. 와중에 터진 `더러운 잠` 파동은 핵폭탄급 변수를 잠복한다. 국회의원회관에서 `곧, BYE! 展`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전시회에 걸린 `더러운 잠` 그림은 우리 정치의 `경박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해프닝, 그 추태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기성품 오브제들을 뜯고 잘라 알기 쉬운 선동깃발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고상한 예술로 포장하는 것은 분명 낯부끄러운 짓이다. 이미지 이것저것을 `따 붙이기` 방식으로 덧붙여내는 허접한 `장난질` 결과물에 한사코 `표현의 자유` 보호막을 치는 사람들이 판을 친다. 그런 창작이 예술의 영역에 맞닿으려면 어디까지나 시대를 초월하는 고뇌와 심화된 의미가 내재돼 있어야 한다.
국회 내 전시회를 장만해준 죄로 더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뭇매를 당하고 있다. 그가 던진 `표창`이 자신의 국회입성을 이끌어준 문재인의 심장에 적중했다는 조롱까지 당하고 있다. 같은 당 우상호 원내대표까지 나서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벌거벗겨 풍자하는 그림을 걸었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었겠는가”라며 비판했다.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저질 선동놀음인 `더러운 잠`이 함유한 `여성혐오`의 천박한 의식에 대해서 나라 안 온 여성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써 눈을 가리고 입을 틀어막은 더민주당 여성의원들의 오불관언 행태를 주목한다. 더민주당 지지층 중 그림의 내용과 전시장소가 모두 문제없다는 사람이 무려 41.7%였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진영논리에 찌들어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외눈박이 정치의식을 넉넉히 노정한다. 그 피비린내 나는 패가름 가치관들이 통탄스럽다.
`예술가` 완장을 차고 사시사철 선동화(煽動畵)만 찍어내는 짓거리에 여념 없는 돌연변이 사회주의 국가의 추악한 실상이 떠오른다. 유치한 `조롱`과 `악질 선동`을 끝끝내 `예술`이라고 우기며 발악하는 무리들이 그려내고자 하는 조국의 미래는 무엇인가. 또 그 치졸한 선동행위를 `괜찮다`하는 적지 않은 `진보` 민심의 가슴 속에 붙박인 `증오`의 실체는 무엇이고, 지향점은 또 어디인가.
현대미술의 한 획을 그은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천박한 해석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신비로운 존재로 남기를 원한 그는 `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모두 다른 답변을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죽고살기로 창을 겨누고 마주 서서 오직 민심 갈라치기를 위한 꼼수에 매달려 이기겠다는 `욕심`에만 함몰돼가는 구태정치가 걱정이다. 북풍한설보다도 더 차가운 `적개심` 공화국의 막장풍경에 민심은 점점 더 얼어붙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