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는 생몰(生歿) 자체가 기구했다. 마르크스·레닌이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을 설립한 1917년에 길림성 연길시 용정에서 태어났고, 동경 입교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중 1944년 2월 `독립운동을 한 죄`로 2년 형을 받고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하며,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으며 생체실험 대상이 되다가, 면회 간 가족들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한 모습으로 변해 있더니, 1945년 3월 “옥사했으니 시체를 찾아가라. 기일내에 오지 않으면 의과대학 해부용으로 보내겠다”는 통고를 받았으며, 화장한 유골을 고향 용정 동성교회 공동묘지에 묻었다.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 한 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연구가들은 한 목소리로 “순백의 영혼을 가진 시인”이라 한다. 독립운동이니, 투쟁이니 그런 과격한 생각을 할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독립운동죄`를 그냥 받아들였을까. `서시(序詩)`속에 그 이유가 들어 있을 듯하다.
오무라 마스오(83) 와세다대 명예교수는 대표적인 윤동주 연구가이다. `서시`에 스며 있는 순백의 영혼에 매료된 그는 한국 학자들보다 먼저 윤동주를 추적해 10편의 논문과 저서를 냈다. 시인의 흔적을 더듬어 그의 묘지를 가장 먼저 발견하자, 한국 학자들은 “일본인에 의해 묘지가 발견되다니, 윤동주를 두 번 죽였다”며 한 발 늦었음을 탄식했다. 묘지에는 한문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 쓴 비석이 서 있었다. 오무라 교수는 경기도 과천에 있는 윤동주 유족을 찾아 육필원고와 습작노트도 넘겨받았고, 용정 생가터와 광명중학교 학적부 등도 확인해 `윤동주의 사적에 대하여`란 논문도 발표했다.
올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 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자들이 드문 이 나라에 그가 부끄러움을 가르치기를….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