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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牛溪)와 율곡(栗谷)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7-01-24 02:01 게재일 2017-01-2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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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청산이요 태없는 유수로다/값 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분별 없이 늙으리라”

우계 성혼(成渾)은 1535년에 태어나 임진왜란때 타계했다.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가난과 싸우다가 왜란이 나자 세자의 요청에 따라 우참찬의 벼슬을 받고 서애를 도우며 전장을 누볐다. 닥종이로 옷을 지어 입을 정도로 궁핍했지만, 선조(宣祖)가 아무리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그는 선조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 밑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율곡 이이는 우계보다 1년 뒤에 태어나 임진왜란 8년 전에 타계했으니, 전쟁의 참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서거를 보고는 절간에 들어가 불법을 공부하다가 논어(語)를 읽고는 성리학에 빠졌다. 성혼과 달리 율곡은 `참여파` 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데 힘을 보태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 했다. 선조 임금이 비록 암군이지만 설득하고 선도해야지 임금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낙향과 등용`을 여러 번 반복하며 당쟁의 와중에 통합과 화해를 위해 애쓰다가 48세에 서거했다.

우계와 율곡은 이렇게 생각이 다르고 인생행로도 달랐지만 성리학의 가르침을 따라 요순시대를 구현하고 백성이 편안하고 도덕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들겠다는 뜻에는 완전 일치했다. 그리고 나라의 운명을 바로 읽어내는 능력도 둘은 공유하고 있었다. 우계는 율곡의 주선으로 47세 되던 해 선조를 만나 `혁폐도감`이라는 개혁 담당 부서를 설치하라 건의했다. 이대로는 안 되니 시급히 개혁을 단행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율곡도 `경제사`를 설치해 조세제도를 혁파하라고 제안했다. 둘 다 “시급히 경장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극언까지 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지만, 선조는 그 말을 듣지 않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개혁을 게을리하다가 국란을 당하기도 하지만 개혁을 서둘다가 역풍을 맞는 경우도 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 그래서 “중용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고 했다.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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