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새해가 시작됐다. 모두가 희망찬 새해를 설계해 보지만 국가 현실이 그리 희망적이지 못하다. 최순실 국정농단이 대통령 탄핵소추로 이어지며 나라 안팎이 매우 불안한다. 고물가, 저성장, 고실업 등 각종 경제지표는 적신호를 보내고 있다. 미국과 일본, 중국 등 주변 국가들간 외교관계도 순탄치 못하다.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인들은 연일 쌈박질만 하고 있으니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흔히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역사라는 거울이 우리에게 비춰주는 것을 바로 보고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경계를 일깨워주는 뜻일 것이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니 과거 역사의 거울을 들여다 보게 된다.
조선 왕조시대에도 오늘의 현실과 비슷한 시대상황이 있었고 어김없이 불행한 역사로 기록됐다. 조선 선조는 명조가 후사도 없이 34살의 나이로 돌연사하면서 왕이 됐다. 선조는 중종의 일곱번째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얼떨결에 왕이 됐다. 다른 세자들처럼 군주수업을 받지 않아 국가를 통솔할 능력이 없었고 문무관료들에 의한 국정농단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심한 권력다툼으로 날을 지샜다. 이 당시 정쟁의 결정판은 당시 서인이었던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김성일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한 보고에서 드러난다.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은 “장차 일본이 반드시 조선을 쳐들어 올 것이니 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복명했지만 김성일은 정반대 의견을 냈다. 당시 조정은 동인의 세력이 강성해 황윤길의 의견을 묵살했다. 나중에 동인들이 김성일에게 정말 일본이 쳐들어 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때 김성일은 “쳐들어 올 것같다. 그런데 서인이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같이 쳐들어 온다고 답하나. 무조건 반대해야지”라고 답했다. 이후 조선은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게 된다. 역사학자 설민석은 한 강연에서 “임진왜란 패배의 원인은 붕당 정치의 변질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국익과 국민은 안중에 없고 당리당략에 따라 무조건적 반대만 하는 현재 우리 정치판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다. 선조에 이은 광해군과 인조로 이어지는 시대상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은 전통적인 사대주의 외교보다 실리위주의 등거리 외교를 추진했다. 당시 국제정세는 기존의 대국 명나라에 대응해 금나라가 신흥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광해는 명나라의 파병요구를 받자 파병군을 인솔하는 강홍립 도원수에게 “형세를 봐서 적당히 투항한 뒤 후금에 우리의 난처한 처지를 설명해 오해가 없도록 하라”는 밀명을 내렸고 강홍립은 왕명을 수행했다. 광해는 두 강대국 사이의 긴장관계를 슬기롭게 대처하며 전란의 위기를 헤쳐나갔다. 하지만, 광해가 인조반정으로 왕에서 쫓겨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광해는 어린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서모이지만 왕비였던 인목대비를 폐모시킨 패륜의 죄목으로 신하들에게 탄핵됐다. 반정공신들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인조 역시 군주로서의 능력이 모자랐다. 사대부들의 국정농단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고 외교정책은 친명사대주의로 바꿨다. 그 결과는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의 전란을 불러들였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대통령이 탄핵소추됐고 결과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질 수 있다. 후보자에 대한 인물검증절차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급하게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또 북핵문제로 파생된 사드배치 문제로 중국과의 외교마찰이 심상찮다. 후보자들 간 사드배치에 대한 찬반 입장도 명확하게 갈려 있다. 독도 영유권 분쟁을 촉발시키고 있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조짐도 우려스럽다. 조선시대 일본과 청나라의 외침을 받았던 불행한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