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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와 역리

등록일 2017-01-11 02:01 게재일 2017-01-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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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주말 날씨가 겨울 같지 않고 따뜻했다. 볼락 낚시를 하러 포항에 있었는데 낮 기온이 15도까지 올랐다. 지난 주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번 겨울 전체적으로 포근하다. 소한에도 춥지 않아 계절을 착각한 개나리가 곳곳에서 피어났다. 유채꽃과 동백이 만발한 제주도는 여행 욕구를 자극시킨다.

추운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따뜻한 겨울이 반가울 만도 한데 막상 그렇지 않다. 자연의 이치가 어그러지는 게 언짢다. 삼한사온이니 엄동설한이니 다 옛말이 되어버린 듯하다. 겨울엔 좋아하는 낚시도 쉽지 않고, 빙판에서 자빠지기 일쑤고, 귀찮게 내복을 껴입어야 하고, 난방비 걱정도 해야 하지만 지나온 겨울을 추억하면 얼음처럼 아름다운 순간들은 모두 맹렬한 추위 속에 있었다.

동네 비탈길에서 썰매 타던 생각이 난다. 구멍가게 앞을 지날 때면 뜨거운 김 내뿜는 호빵 찜통 앞에 한참 서서 침을 삼켰다. 스무 살에 운동화 신고 올랐던 태백산 상고대의 숨 막히는 절경을 잊을 수 없다. 밤새 안 써지는 글을 붙잡다가 한숨 쉬러 반지하를 나섰을 때 세상의 모든 지붕들이 폭설에 덮인 걸 보고 눈물을 흘린 적 있다. 발 시려 금방 그만뒀지만 맨발로 눈 쌓인 골목을 걷기도 했다. 연인과 맞잡은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고 천원 지폐와 동전 털어서 산 군고구마 나눠먹던 겨울도 몹시 추웠다.

알래스카에 자리 잡은 상층 고기압의 영향으로 한반도 북쪽에 제트기류가 형성, 북반구의 찬 공기를 막고 있는 것이 포근한 겨울의 원인이다.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 강에서 쏘가리 낚시를 즐기는데, 요즘 날씨가 따뜻하다보니 1월인데도 여기저기서 쏘가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겨울 쏘가리 낚시에 성공한 이들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부러워 죽겠다. 나도 한번 가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쏘가리는 겨울엔 활동하지 않는다`는 속설에 담긴 순리를 지키고 싶어서다.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하기 전의 이야기겠지만, 쏘가리 낚시는 매화 필 때 시작해서 첫 서리 내릴 때 마친다고 들었다. 더 일찍 개시해서 더 늦게 마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넉 달에서 다섯 달쯤은 굳이 하지 않는다. 쏘가리도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대신 겨울에 제철을 맞은 볼락이나 호래기 등을 잡는 것으로 심심함을 달랜다. 좋아하는 야구도 겨울엔 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걸 더 좋아하려면 적당한 휴식과 공백이 필요하다. 아무리 춥지 않다 하더라도 내게 겨울은 쉼과 멈춤의 계절이다. 그게 나는 순리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나에 대한 타인들의 평가를 확인한 일이 있다.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타인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타인의 평가가 나라는 사람을 규정하거나 내 전부를 나타내줄 수는 없지만, 그 평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나를 A로 알지만 세상 사람들은 B라고 한다면, B를 인정하는 게 순리다. 세상의 이치란 불변하는 것 같아도 변하기 마련이다. 세상이 다 제멋대로 뒤죽박죽이더라도 꿋꿋이 제자리에 서는 순리가 있고, 변화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 때 그 질서에 적응하는 순리도 있다.

세상이 바뀌어도 지킬 건 지켜야 한다. 또 때로는 세상이 바뀌면 부지런히 그 변화를 쫓아가야 한다. 세상이 변한다고 중심을 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새로운 시대를 낡은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도 문제다. 새해가 밝았으니 내 삶에서 무엇이 순리이고 역리인지 가려봐야겠다. 어쭙잖게 부화뇌동하는 구석은 없는지, 미련하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착각 속에 머물러 있는 데는 또 없는지. 거울 앞에 서면 20대 때와는 많이 달라진 내 모습에 마음이 처참하다. 날렵한 몸매와 턱선은 온데간데없고 웬 슈렉이나 사스콰치가 종종 서 있다. 시간의 섭리라고 생각할 게 아니다. 여기에는 순리 대신 역리가 필요하다. 이 낯선 변화가 완전히 나를 지배하기 전에 다이어트에 성공해야 한다. 나는 아직 젊기 때문이다. 나이에 맞는 멋을 유지하는 것, 그게 2017년 나의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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