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병원에 도착하면 의료진이 가장 먼저 하는 절차가 진단(診斷)이다. 진단은 질환의 증세와 병리검사를 바탕으로 병인(病因)과 병소(病巢)를 찾아내어 적용해야 할 치료법을 선택하는 과정을 말한다. 진단의 정확성 여부는 치료효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질병 완치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상식은 따로 있다. 바로 치료의 적기를 놓치지 않는 일이 그것이다.
`개헌`이 `대통령 탄핵`을 넘어서 정치권 최대의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대선 전`에 하느냐, `대선 후`에 하느냐를 놓고 정치권이 두 패로 갈리고 있는 형국이다. 나중에 하자는 쪽은 `조기대선(早期大選)`이 유력한 상황에서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으뜸사유로 꼽는다. 개헌방향과 내용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주장들을 그렇게 빨리 갈래지을 수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 주장대로 개헌을 다시 미뤘을 경우,`국정농단` 사태로 이미 사달이 난 이 나라 정치는 정말 괜찮을까. 그러려면 우선, 대통령과 중앙정부에 집중된 막강한 권력으로 인한 병폐가 잠시라도 개선된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톺아보아도 그럴 가능성은 전무(全無)다. 권력중심을 향해 몰려든 정치모리배들이 온갖 협잡을 꾸며대고, 중앙정부의 지독한 갑질 관행이 근절되지 않는 한 달라질 가망은 없다.
조기대선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에서 정치권은 `누가 대권을 잡느냐` 쪽으로 온갖 신경이 쏠려가고 있다. 조만간 유력주자들 뒤쪽에 줄을 서려는 이합집산 흐름은 빨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정치꾼들은 지지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챙겨야 할 반대급부 전리품 계산에 분주해질 참이다. 권력 장사꾼들의 입장에서 `개헌`은 절대로 유리한 카드가 아니다.
일부의 예측처럼 개헌의 `내용` 자체가 최대의 대선이슈가 될 가능성도 있다. 대선주자들의 구체적인 `개헌` 공약이 유권자들의 중요한 판단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중요한 것은, 이번에는 대선주자들의 `개헌` 공약이 결코 두루뭉술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대선주자들의 `개헌하겠다`는 막연한 허언(虛言)에 국민들은 그동안 충분히 농락당했다.
역대 대선을 돌아보면 자명하다. 선거과정에서 후보들 거의 모두가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지만, 막상 당선이 되고 나면 싹 바뀌곤 해왔다. `개헌이슈가 블랙홀이 돼 국정동력이 떨어진다`는 종류의 핑계를 앞세워 덮어버리는 일이 되풀이됐던 것이다. 그런 모순들이 막강권력에 취한 정권의 통치스타일을 자꾸만 `불투명`으로 몰아간 것도 사실이다.
`조기개헌(早期改憲)` 주창은 그동안 경험했듯이 이번에도 `개헌` 열망이 또다시 묵살되고 말리라는 합리적 의심에서 출발한다. `권력의 칼자루`를 잡기만 하면 표변하는 몹쓸 전통과 관행들을 저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엄정한 결정 틀을 중심으로 시간표를 짜고 이행하기만 한다면 `개헌`에 관한 논의와 시안(試案)들은 이미 충분하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논거(據)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 정권까지 단 한 번도 권력형 비리가 없었던 정권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꼭 기억해야 할 사명은 또 있다. 중앙정부의 갑질 통제 하에서 그 한계를 오래전에 드러낸 허울뿐인 자치·분권의 참상이 그것이다. 대선과 개헌 국면에서 우리는 지방자치·분권형 국가로의 전환을 기필코 이뤄내야 한다.
응급실 베드에 누워 신음하는 `헌법`을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지금 곧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될 응급상황을 망각하고 늑장을 부리다가는 온 국민들이 또 무슨 대가를 더 치러야 할 지 모른다. 독점적 권력구조와 행태를 혁신하는 `개헌` 말고 우리가 나아갈 `길`은 따로 있지 않다. 유례없는 `국정농단`에서 비롯된 참담한 국가적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슬기는 `개헌`에서 시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