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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등록일 2016-12-28 02:01 게재일 2016-12-2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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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또 한해를 살았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스스로가 대견해서 뭉클하다. 큰 돈을 벌거나 대단한 성공을 거둔 건 없다. 사는 형편은 지난해나 마찬가지고, 여전히 미혼이다. 살이 더 쪘고, 지난해보다 못생겨졌다. 눈에 띄게 진보하고 발전한 것 없지만 감격스럽다. 어떻게든 살았고 지금 살아있다. 그게 눈물겹도록 기쁘다.

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 올해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 세 가지씩을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빴던 일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반면, 좋았던 일은 너무 많아 교묘하게 두세 개 묶어 발표하는 꼼수를 썼다.

경북매일에 매주 칼럼 쓴 것과 문학상 수상 등 글로 이룬 나름의 성과들을 묶어 3위에 올렸다. 이 글이 50번째 칼럼이다. 펑크 없이 50주를 왔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많은 약속들로 이뤄진 여정이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자축할 일이다. 매주 칼럼을 쓰다 보니 시나 비평 등 문학적 글쓰기에도 순기능이 된 것 같다. 문학상 상금으로 빚도 갚고 밀린 방세도 냈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것과 모교에 시간강사 출강하게 된 것을 `학문적 경사`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여 2위에 올렸다. 더는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돼서 벌써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다. 모교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일은 봄과 가을 내내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맘껏 누린 `취미의 폭발적 중흥`을 1위로 꼽았다. 그 맛에 살았다.

2월엔 북극해가 파도치는 노르웨이 트롬소 해변에 텐트 치고 자면서 낚시로 대구를 낚았다. 매화 피는 봄부터 단풍 가을까지 섬진강으로 매주 쏘가리 낚시를 갔다. 내친김에 노와 오리발로 이동하는 밸리보트를 사서 큰 호수 구석구석을 누볐다. 바다낚시도 자주 했고, 제주도에도 두 번 다녀왔다. 그 사이 차는 5만km를 주행했다. 사회인야구 리그에서 우승의 기쁨을 맛보았고, 투수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취미가 삶을 끌고 왔다. 내년에도 이렇게 살고 싶다.

따지고 보면 나빴던 일도 많다. 지금은 회복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더 내려갈 데도 없는 신용등급은 끝내 더 하락했다. 여러 도전에서 실패했고, 꼭 되었으면 하는 일은 거절당하거나 아예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에게서 멀어지는 마음들을 끝내 붙잡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재해나 재난, 전쟁, 사고, 불치의 병을 겪은 것도 아니다. 범죄자로 전락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쓴 일도 없다. 가족을 잃지도 않았다. 하긴 몇 해 전 큰 교통사고로 다리 두 군데가 으스러졌을 때도 불행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니, 생을 긍정하고 낙관하는 건 천성인지도 모르겠다.

“1년 내내 고생해 거두어 반쯤 말린 포도가 한 아름씩 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광경을 보았다. 통곡 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문간에 서서 수염을 깨물던 아버지를 보았다. 어머니가 그 뒤에 서서 훌쩍훌쩍 울었다. `아버지.` 내가 소리쳤다. `포도가 다 없어졌어요!` `시끄럽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나는 그 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순간이 내가 인간으로서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위대한 교훈 노릇을 했다고 믿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의 한 대목이다. 죽고 병들고 저 하나 어쩌지 못하는 인간이 실존 한계와 싸우며 몸부림치는 모습에 나는 늘 감동한다. 재해, 가난, 병, 죽음 등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모든 불행 가운데서도 먹고 마시고 웃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인간다움`은 위대한 것이다. 세상은 어수선하고 캄캄해도 나는 아직 나로 살아 있다. 작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한 해를 잘 살았다. 세상은 멈추고, 때로 후퇴하고, 또 때로는 침몰하지만 나는 움직이고, 나아가고,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보다 더 분명한 증거는 없다. 모든 게 다 없어져도 나만은 없어지지 않았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주말 지나면 새해 첫 월요일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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