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이사르(Caesar)를 사랑한다. 그러나 로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그를 죽였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한 카이사르를 쓰러트렸다. 속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사죄할 뿐이다.”
BC(기원전) 44년 3월15일 로마제국 원로원 회의장에서 절대군주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Brutus)가 한 비장한 연설의 일부다.
브루투스는 `로마를 더 사랑한다`는 대의로 자신을 아끼고 키워준 카이사르를 암살했지만 권력에서 밀려나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는 로마를 장악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에게 패해 동굴로 피신했다가 자살한다. 브루투스는 마지막 전투에 앞서 “카이사르를 죽인 3월15일 이미 나는 나라를 위해 죽었던 사람”이라며 운명적 의지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로 비롯된 박근혜 정부의 절대위기 국면에서 난파선 몰골이 된 새누리당이 또 한 번 국민들에게 `멘붕(멘탈붕괴)` 폭탄을 던졌다. 지난 15일 원내대표 선거에서 친박계(친박근혜계)를 대표해서 출마한 정우택 후보(62표)가 비박계(비박근혜계)를 대표해 나선 나경원 후보(55표)를 따돌리고 당선돼 모든 예상을 뒤집어 엎은 것이다.
우리는 작금, 정치가 민심을 외면하고`그들만의 리그`에 도취될 때 나타나는 대의민주주의(代議民主主義)의 치명적인 하자를 발견하고 경악하고 있다. `다수`가 곧 `정의`는 아니라는 부작용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때 민주주의는 위험해진다. 수백 만 국민들이 `물러나라`고 외치는 판에 엎드려 빌어야 할 무리들이 뒤꼍에서 다시 완장을 바꿔 차고 있는 형국이다.
새누리당 안에서 벌어지는 친박-비박 공방은 점입가경이다. 친박은 대통령 탄핵 대열에 동참한 비박의 과거발언까지 들추면서 `배신자` 이미지를 덧씌우느라고 여념이 없고, 비박은 친박을 향해 `최순실의 남자들`이라며 낙인을 찍고 있다.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간 리얼한 막장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한때 인간사회의 미덕을 망가뜨리는`배신`이 비일비재한 풍토를 풍자하여 조직폭력배들의 `의리(義理)`를 미화한 영화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미남배우들이 거칠기 짝이 없는 `나쁜 남자`로 분(扮)하고 나타나 절박한 상황에서도`의리`를 지키는 멋진 모습으로 특히 여성들과 청소년들의 동경심을 무한히 자극했었다.
대다수 조폭세계의 처참한 일상들이 생략된 영화속의 낭만은 결코 현실일 수 없다. 더욱이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정치현장에서 폭력배들의 언어로 주고받는 `의리` 논쟁은 사리에도 맞지 않고 나라를 위해서도 백해무익하다. 국민들은 지금 스위치를 끄고 안 보면 그만인 TV드라마 앞에 앉아있는 게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정치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단어는 `정의(正義)`다. 정의는 법(法)을 통해서 구현돼야 한다. 그 무엇이라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을 칭송하는 일은 혼란의 빌미가 된다. 광화문 일대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순수한 민심을 불순한 욕심으로 덧칠해 `혁명`이라고 치켜 부르는 것도 섣부른 짓거리다.
주말마다 벌어지는 시민들의 촛불시위는 무능한 정치권과 나라 지도층에 대한 마지막 경고이자 준엄한 `혁신` 명령이다. 국민들로부터 보이콧을 당한 세력이 끼리끼리 뭉쳐서 다시 깃발을 주고받는 일이야말로 민의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지금은 지휘봉 깨끗이 넘겨주고 석고대죄(席藁待罪)하는 것이 맞다.
브루투스에 대한 사가(史家)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때로는 `배신`의 아이콘이 되기도 하고, 진정한 `충신`의 사표로 회자되기도 한다. 그의 역사적 행동이 남긴 교훈은 자명하다. `개인`에 대한 충심보다 `국가`에 대한 충심이 `충성`의 본질이라는 가르침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맹목적 `의리`가 `정의`의 영역을 능가할 수는 없다. 그게 곧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