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를 봤다. `위플래쉬`를 연출한 다미엔 차젤레의 뮤지컬 영화다. 일 년만의 극장 나들이였다. 그동안 마땅히 볼 게 없었다. 영화에 까다로운 감식안을 들이대거나 지식깨나 가진 것은 아니다. 그저 현실과는 좀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걸 멋지게 보여주는 영화에 구미 당긴다. 영화는 내가 살지 못한 삶의 대리체험, 스크린은 다른 세상의 입구다.
예술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땅에 발붙인 채 머리로는 하늘을 나는 일이 아닐까.
일상은 삶의 중력에 붙잡혀도 상상은 우주를 유영하는 것, `라라랜드`도 그렇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꿈을 좇아가다가도 때로는 자기 열정을 위반하며 스스로 꿈에서 멀어지기도 하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그들의 희로애락은 지극히 현실적인데,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는 천문대 언덕의 노을 풍경이 대학로 낙산공원과 꼭 닮아서 나는 더 큰 현실감을 느꼈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밤하늘로 날아올라 춤추며 노래할 때, 황홀감에 나른했다. 다른 세상을 봤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상상력은 아니지만, 전체 맥락과 분위기에 어울리게 연출되었다. 터무니없이 공상적이지도 않고 평범하지도 않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한번쯤 가져봤을 법한 상상이다. 공감은 거기서 일어난다. 다미엔 차젤레는 나랑 동갑인데, 나는 속으로 `너 나랑 비슷한 상상을 했구나?` 혼잣말했다.
영화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만큼 전하려는 메시지나 감성자극이 인간과 무관할 수 없다. 사랑, 정의, 슬픔, 공포 같은 추상적 관념들을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표현하느냐의 문제다. 주인공이 하늘을 날고, 거미로 변하고, 시간여행을 하더라도 인간 보편의 정서를 만지면 관객은 공감한다.
`땅에 발붙인 채 머리로는 하늘을 나는 것`이 내용과 형식의 균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상적 형식에만 치우쳐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마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디 워`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같은 경우가 `뜬구름`이다.
철없는 짓이지만 요즘 일본 애니메이션`드래곤볼`에 심취해 있다. 유년기 때 만화책으로 다 봤는데 몇 장면이 문득 궁금해 한두 편 내려 받아 본 것이 실수였다.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고 25분짜리 153부작을 일주일 만에 다 보고 말았다. 손오공과 그 친구들은 장풍으로 산을 날려버리고, 구름 타고 날고, 여러 초능력을 발휘한다. 구슬 일곱 개를 모으면 용이 나타나 소원을 이뤄준다는 설정도 허무맹랑하다. 그런데 손오공이 죽은 할아버지와 재회하는 장면이라든가 친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대목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영화를 통해 체험하고픈 다른 세상이라는 것도 결국 우리 마음속에 늘 존재하는 이상향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안에 항상 있지만 현실엔 없는 것,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세계를 예술은 보여줘야 한다.
`드래곤볼`도 강함에의 동경, 영원한 삶을 향한 소망, 사후세계나 신에 대한 호기심이 그 바탕을 이룬다. 신화나 전설도 마찬가지다. 거인이 등장하든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든 간에 거기엔 인간 보편의 소망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기 마련이다.
`청와대 극장`이 왜 폭삭 망해 주저앉았나. 관객인 국민들의 소망은 전혀 반영하지 못한 채 감독, 주연, 조연 모두 황당무계하고 초현실적인 대사와 행동으로만 일관했기 때문이다. 국민 아니 인간 보편의 정서는 아무데도 없고, 그저 주인공들끼리 구름 위에서 희희낙락했다. 웃길 땐 웃겨주고 감동이 필요할 땐 감동 주는 캐릭터를 적재적소에 등장시켜야 하거늘 국민들 슬픔과 분노의 지점은 포착 못하고 `암 유발` 인물들만 잔뜩 내보냈다. 국민들은 민생이라는 땅에 발붙인 채 머리로는 끊임없이 더 좋은 세상을 가리키는 지도자를 기다린다. 당장 현실의 고단함이 나아지지 않더라도 상상만큼은 풍요로울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한다. 지금 이 `촛불의 도시`(city of candles)가 언젠가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꿈들로 빛나는 `별들의 도시`(city of stars)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