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러 동네 마트에 갔다. 비 오는데 마트에서 우산꽂이를 준비해두지 않았다. 마트 내부에 물 떨어질까 봐 우산을 입구에 세워두고 들어갔다. 라면과 깻잎 통조림, 캔맥주 따위를 들고 계산대 앞에 섰는데, 먼저 선 아주머니가 계산대 위에 젖은 우산을 올려두고 있었다. 계산대는 물로 흥건했고, 물건 올려둘 공간이 없었다. 캔맥주 쥔 손이 시렸다. 짜증이 났다.
송년 모임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 지하철 문이 열렸는데 문 앞에 서 있던 젊은 커플이 애틋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들 때문에 못 내리는 전동차 내 승객들과 빨리 타려는 승강장의 승객들이 뒤엉켰다. 그런데도 아랑곳 않고 문 가운데를 막아 선 채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 열불이 났다. 그냥 지하철이란 말이다. 입영열차도 아니고, 은하철도도 아니고, 유라시아 횡단열차도 아니다. `너희들은 반드시 헤어질 것이다. 헤어지는 방법도 아주 비참하게 찢어질 것이다` 속으로 저주를 퍼붓고 내렸다.
내 행동이 타인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지하철 한 시간만 타도 그런 사람 여럿 본다. 이어폰 밖으로 쿵쾅거리는 음악소리, 두세 사람 서 있을 공간을 독차지한 백팩,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쩍벌`들, 욕설, 비속어, 웃음소리로 소음공해 만드는 무개념 통화 등 유형도 여러 가지다. 비 올 때 출구 나가기도 전에 우산 펴는 짓 좀 안했으면 좋겠다. 비 한두 방울 맞는 게 그렇게 싫은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우산 펴느라 길 막고, 뒷사람한테 빗물 튀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나는 공익을 위해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태안 만리포에 기름 닦으러 갔던 것이나 ARS 전화로 수재의연금과 불우이웃 성금 내본 게 전부다. 그래도 공해는 끼치지 않고 살았다. 이타적으로 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기적이지는 않았다. 남을 도와 이롭게 하지는 못해도,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스스로 견디질 못한다. 내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는 게 싫은 만큼 나로 인해 타인이 불편을 겪는 것도 싫다. 휴대폰은 항상 무음 모드, 대중교통 내에선 급한 전화 아니면 통화도 잘 하지 않는다. `내리는 승객 먼저`, `하차하는 승객을 위해 내렸다가 다시 타기`는 시민의 당연한 에티켓이다.
어쩌면 내가 개인주의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택시에 타거나 식당에서 밥 먹을 때, 기사나 가까이 있는 종업원이 들을까봐 친구와 사적 대화도 잘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다르다. 올바른 개인주의는 `나`라는 개인이 보장되는 만큼 타인 역시 개인으로 존중하고 보호해주는 것이다. 나와 타인 사이의 선을 함부로 넘지 않는 개인들이 이룬 사회야말로 진정 건강한 공동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이 비눗방울 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자주 상상한다. 일종의 보호막 같은 것이다. 모두 똑같은 반경의 둘레 속에 저마다 `자기범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례, 양심불량, 부도덕으로 그 방울을 뚫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보호막을 찢는다. 피해 입은 사람들이 항의하면 그들은 `내가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사회의 재산과 생명, 안전을 짓밟고 파괴하는 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면, 개인의 고요와 휴식, 자기범위 내에서 이뤄지는 내밀한 취향을 훼방하는 자들 역시 테러리스트다.
원하는 걸 해줄 수 없다면 싫어하는 짓이라도 안 해야 된다. 국민들이 바라는 건 단 하나인데 그건 안하고서 싫어하는 일만 골라 한다. 불 난 시장에 가서 피해 상인들의 호소 한 마디 듣지 않고 사진만 찍고 왔다고 한다. 지금이 어느 때인 줄도 모르고, 여전히 국민들의 비눗방울엔 관심 없이 자기 보호막만 지키려 한다. 매주 광장에서 국민들은 자기 `개인`은 포기하고 타인의 `개인`은 존중하는 멋진 공동체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과 대통령을 지키려는 이들만 딴세상 사람 같다. `이기적 유전자`가 있는 모양이다. 한 사람 때문에 5천만명이 불편하다는 걸 왜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