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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쿠바혁명과 촛불시위

등록일 2016-11-30 02:01 게재일 2016-11-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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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식 제2사회부 차장
▲ 홍성식 제2사회부 차장

지난 26일 피델 카스트로(1926~2016)가 죽었다. 체 게바라(1928~1967), 카밀로 시엔푸에고스(1932~1959)와 함께 `쿠바혁명을 이끈 삼두마차`라 불렸던 아흔 살의 노정객(政客)이 지상에서의 삶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그 누구보다 드라마틱했고, 우여곡절 많았던 카스트로의 사망소식을 접하면서 자문했다. “이제 낭만적 혁명의 시대가 끝난 것인가?”

`낭만적 혁명`이라니…. 총탄이 날아다니고 피가 튀는`혁명`과 연애소설에서나 사용됨직한 `낭만`은 얼핏 보기엔 서로 연결되기 힘든 단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 쿠바혁명에는 낭만적 요소가 적지 않게 포함돼 있었다. 앞서 언급한 세 사람의 삶은 현실이 아닌 낭만주의시대 소설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20~30대 청년 수십 명이 전투경험이 없는 농민들과 연대해 중화기로 무장한 8만 명의 정규군을 굴복시킨 쿠바혁명은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카스트로와 게바라, 시엔푸에고스가 부정과 부패를 거듭하던 풀헨시오 바티스타정권을 향해 총을 들었던 때는 1956년. 카스트로는 서른의 청년이었고, 시엔푸에고스는 소년의 티를 채 벗지 못한 스물넷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해방쿠바`를 향한 발걸음에 나이는 어떤 문제도 되지 않았다.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의사가 돼 편안한 삶을 누렸을 스물여덟 살 게바라는 눈앞에서 포탄이 터지는 진격작전의 선두에 서는 걸 단 한 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잘생기고 용맹한 사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적군 부상자의 상처를 기꺼이 치료해주는 낭만적 휴머니티 또한 잃지 않았다.

1958년 쿠바혁명의 성패를 결정지은 `야과하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시엔푸에고스는 불요불굴의 용기와 탁월한 판단력을 갖춘 지휘관이기 이전에 낭만적인 문학청년이었다. 매일 같이 목숨을 건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시를 스페인어로 번역한 시집과 독일·프랑스의 철학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들의 맏형 격이었던 카스트로 역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넝마처럼 걷어찼던 사람이다. 가난한 이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 자신의 배를 불리는 폭압적 정권의 종으로 살기를 거부한 것. 1959년 카스트로가 쿠바혁명 완수를 선언하던 날,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떠도는 낭만적 일화 중 하나다.

마치 한 편의 소설과도 같았던 쿠바혁명의 낭만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이것 외에도 많다. 시엔푸에고스는 성공한 혁명의 달콤한 열매를 한 조각도 맛보지 못하고 비행기 사고로 실종됐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시엔푸에고스의 얼굴은 쿠바 화폐에 새겨졌다.

아프리카 콩고와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에도 혁명정부를 세우고자 낡은 소총을 들고 정글 속을 뛰어다니던 게바라. 그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아내여, 당신보다 인류를 더 사랑한 나를 용서하시오”란 유언을 남겼다.

살아있는 동안 자그마치 634번의 암살위기를 피해갔던 카스트로도 시간과 노화라는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시엔푸에고스와 게바라에 이어 카스트로까지 사라짐으로써 낭만적 혁명의 시대도 소멸된 것일까?

최근 한국의 상황이 쿠바혁명 시기 이상으로 뜨겁다. 지난 주말엔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질타하는 190만 국민들의 촛불이 거리 곳곳에서 켜졌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돌과 화염병이 아닌, 노래와 풍자라는 낭만적 수단으로 새로운 세상을 밝히고자 한 우리 국민들. 쿠바에서 사라진 `낭만적 혁명의 시대`가 한국으로 옮겨오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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