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별이 쏟아지는 광장으로 가요

등록일 2016-11-16 02:01 게재일 2016-11-16 18면
스크랩버튼
▲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백만 촛불이 타올랐다. 사는 곳, 나이, 하는 일이 각각 백만 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국민이라는 한 이름으로 모였다. 박근혜 정부가 주장하던 국민대통합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세종로를 흐르는 촛불은 용광로 쇳물 같았다. 함성은 뜨겁고 이성은 냉정했다. 집회는 내내 질서와 평화를 유지했으며, 폭력이나 비양심이 드물게 삐져나오려 할 때마다 자체 정화되었다. 사람들은 일그러진 국가 면전에다 국민의 위엄과 품격을 보여주었다.

시위라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웠다. MC의 진행과 가수 공연, 시민들의 자유 발언은 선동이나 호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트 넘치는 해학과 풍자, 자기반성 등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무척 세련된 것이었다. 정치인을 비롯해 사회 저명인사들도 있었지만, 내빈 소개 같은 의전 따위 끼어들 수 없었다. 광장의 주인은 오직 국민이어서 국민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직함이나 자격은 무용했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흥분한 일부 어른들로부터 경찰을 보호했다. 기성세대 눈에 인터넷 폐인으로만 보이던 `이태백` 청년들이 “지지율도 실력이야. 네 부모를 탓해” 같이 재치 번뜩이는 팻말을 들고 집회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30대 젊은 아빠는 이제 갓 말을 배우는 어린 아들에게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마음대로 해서 화가 난 사람들이 야단치러 모인 거”라고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줍고, 줄 서서 지하철 타고 귀가했다. 백만 촛불집회는 국민의 분노만 나타낸 것이 아니라 성숙한 의식, 젊은 세대 문화의 건강하고 역동적인 힘을 함께 보여주었다. 반짝이는 눈빛, 미소와 어우러진 촛불들은 꼭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 같았다.

십여 년 동안 광장을 외면하고 살았다. 효순·미선 추모 집회가 열린 2002년 11월, 광화문 거리에 나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질렀다. 분노와 슬픔의 대열이 평화롭게 거리행진을 하던 중, 거대한 깃발과 붉은 머리띠들이 대열로 비집고 들어와 과격하고 폭력적인 구호를 부추기는 걸 보았다. 특정한 정치 목적을 지닌 이데올로기 집단에 의해 일반 시민들의 순수한 마음이 이용될 수 있다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버거킹과 스타벅스에 앉아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을 향해 욕설과 야유를 퍼부으며 거기서 나오라고 강요하는 모습은 인민재판이나 다름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광장과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광장에 다시 나가려고 한다. 12일 집회에는 오래 함께 하지 못하고 잠시 몇 걸음 보탰을 뿐이지만, 내게는 큰 변화이자 용기다. 딱딱하고 날카롭던 광장을 부드럽게 바꿔낸 국민들 덕분이다.

예전엔 사람 많이 모인 곳에서 언제나 추태가 벌어졌다. 어릴 적 야구장에 가면 어른들이 욕설을 하고 경기장에 쓰레기통과 술병을 집어던졌다. 관중석에 불을 지르는 미치광이들도 있었다. 연고지 정치인을 연호하며 상대팀 관중들과 패싸움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여성들부터 어린 아이까지 누구나 흥겹게 응원가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세대가 바뀌니까 문화도 달라진다. 광장에 대한 내 마음의 장벽을 허문 것은 박근혜 정부를 향한 국민 공통의 분노이기도 하지만, 집회문화, 아니 세대문화의 성숙함과 쾌활한 에너지다. 광장은 이제 정의로운 사회참여의 장인 동시에 즐거운 소통과 교류가 이뤄지는 놀이공간이다.

세종로를 도도하게 흐르는 촛불의 강을 보며, 추운 밤거리에 어깨를 견고히 부여잡은 민중의 산맥을 보며 “저 산맥은 말도 없이 오천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오천년을 흘렀네.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국가도 통치자도 먼지처럼 사라지지만 민중은 늘 그 자리에 서서 울고 웃고, 흐르며 살고 죽는다. 백만 촛불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말도 없이 또 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 탐욕스러운 위정자들에 의해 이 터가 더럽혀질 때면 또 다시 산을 이루고 강물로 흐를 것이다. 나도 그 강의 한 물굽이가 되고 싶다. 즐겁고 신나게.

3040 세상돋보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