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왕조시대의 가장 무서운 정치적 형벌은 멸족(滅族)이었다. 반역죄를 범한 자의 `부모·형제·처자` 또는 `친가·외가·처가` 3족(三族)은 물론 `부계 4친족`, `모계 3친족`, `처가 2친족` 등 9족이 참혹한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때로는 10족이라 해서 죄인의 스승이나 문하생까지 몽땅 역도(逆徒)로 묶어 죽였으니 멸족이란 가히 `씨를 말리는 공포의 형벌` 그 자체였다.
우리의 고려·조선 역사에도 `친가·외가·처가` 3족을 극형에 처하거나 참수했다는 기록은 꽤 남아 있다. 멸족을 대신해 내린 형벌이 폐족형(廢族刑)이다. 목숨만은 살려주고, 후손이 대대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한 형벌이다. `폐족`이란 말은 지난 2007년 당시 전 노무현 대통령의 책사였던 안희정 씨가 친노(親노무현) 세력을 언급하며 사용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새누리당이 풍전등화(風前燈火) 신세다. `최순실 게이트`라는 돌발변수의 노정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생애 최악의 곤경에 처한 이래, 좀처럼 무너진 터널을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상태다. 분초를 다투며 폭로되는 상상을 초월한`국정농단` 행태에 온 국민들은 패닉상태에 빠져있고 국정을 책임진 여당은 한 마디로 만신창이다.
누구나 예기치 못하게 너무 큰일을 당하면 억장이 무너지고 말문이 막히는 법이긴 하다. 지난 총선을 앞두고 친박(親박근혜계)과 비박(非박근혜계)으로 나뉘어 박 터지게 싸우던 기개는 어디로들 갔는지 새누리당은 난파선 위에서 갈팡질팡이다. 일순 위태해진 정권 때문에 다들 반쯤은 혼(魂)이 나간 듯하다.
지난 4·13총선 전 친박·진박·쪽박·짤박 등 정치판을 가당찮게 휘돌던 박(朴)타령이 자꾸만 오늘날 참상과 오버 랩이 된다. 기세 좋게 뺄셈정치를 탐닉하다가 역풍을 맞아 총선에서 참패한 폐허 속에서도 `권력`의 꿀단지를 거머쥐고 기어이 당권을 장악했던 친박의 침잠이 깊다. 선거판이 불리해지자 길바닥에 털버덕, 무릎을 잘도 꿇던 그들 아니던가.
오늘날 보수세력(保守勢力)의 천정에 드리운 암울한 망조(亡兆)는 나라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보수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은 선연하다. 분명한 것은 리모델링 정도로는 어림 턱도 없다는 사실이다. 어설픈 혁신놀음으로는 민심을 돌려세우기는커녕 분노를 덧낼 따름일 것이다.
친박과 비박 두 패가 공개적으로 따로 뭉치기 시작했다. 비박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는 `탄핵`이라는 금기어(禁忌語)마저 풀렸다. 그러나 친박 지도부는 `즉각 퇴진` 요구부터 일축했다. 이정현 대표는 계산법의 비밀을 꽁꽁 숨긴 채 “내년 1월21일 당 대표 선출을 위한 조기 전당대회를 개최하겠다”는 생뚱맞은 제안을 내놨다.
이 대표가 친박계 핵심의원을 포함하는 `재창당준비위원회` 발족을 구상하고 있다는 보도내용은 실소(失笑)를 금치 못하게 한다. 새누리당은 부실공사로 무너진 처참한 빌딩 몰골이다. 건축물을 잘못 짓고,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무너지게 만든 회사대표가 그 집을 다시 짓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의 난센스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국민 앞에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통성(通聲)의 참회문을 읽어야 할 무리들이 누구인지 알 사람들은 다 안다. 정치권에는 또 다시`폐족`이라는 단어가 떠돌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내 탓이요`를 외치며 관(冠) 벗어놓고 엎드려 뉘우치는 이가 없는 야속한 나라에서 자존심을 다친 국민들만 괴롭고 또 괴롭다.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 나서는 것 말고 할 일이 따로 없는 민초들이 진정 보고자하는 것은 잔혹한 멸족이나 폐족이 아니다. 허물을 지은 지도자들이 일선에서 흔쾌히 물러나 맹성(猛省)하는 진솔한 모습이다. 사랑은 아무나 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재건축`은 결코 아무나 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