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항상 존재한다. 즉 두 물체가 서로에게 미치는 힘은 항상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Newton)은 움직이는 모든 물체가 운동하는 법칙을 3가지로 설명한다. 첫 번째가 관성의 법칙, 두 번째가 가속도의 법칙, 세 번째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뉴턴이 내놓은 법칙들은 단지 물체뿐만이 아니라, 인간사에도 곧잘 맞아떨어진다. 그 중에도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인간관계나 정치적 상황에 있어서 꽤 정확하게 나타난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이긴 것 같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그 반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정치행태들을 보노라면 그 이치가 문득 문득 떠오른다. `순간의 승자`는 인정하되 `영원한 승자`는 그냥 놔두지 않는 것이 역사의 냉혹한 섭리다. 권력의 과욕으로 생성되는 모든 일방적인 공격은 머지않아 부메랑이 되어 반작용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도 관성에 젖은 정치인들이 이 무서운 법칙을 망각하고 조금만 힘이 생기면 마구 휘둘러댄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정치 지능은 그렇게 더디더디 진화한다.
정치가 실종됐다.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해임건의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회의 소란은 번번이 드잡이판으로 점철되던 이른바 `동물국회`의 몹쓸 추억마저 불러일으킨다. 국민들은 다 아는데, 그들만 모른다. 잔뜩 오그라진 극렬지지자들의 환호성과, 상대편에 대한 반이성적인 혐오가 빚어낸 증오의 드라마는 한 번도 해피엔딩으로 끝난 적이 없다.
이 나라가 직면한 상황은 난치병에 걸린 중환자 꼴이다. 만성적인 불경기도, 북핵 위협도, 흔들리는 땅도 마땅한 대책이 안 보인다. 어쨌든 뭐를 좀 해보자고 누군가 치료법을 내놓으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는 반론과 비난만 무성하게 쏟아진다. `대안`도 없이 `안 된다`고 우기는 돌팔이 윤똑똑이들의 난장(場)이다.
여소야대(與小野大)로 형성된 정치구도 안에서, 정부여당은 어쩌자는 심산인지 도무지 타협의 여지를 만들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근육자랑에만 빠져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비서관·장관들에 대한 파상공세가 점입가경이다. 새누리당은 도무지 요령부득의 모습이다.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모습으로는 여소야대고 뭐고 끝까지 뻗대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나 한판 벌여볼 속셈 아닌지 의심스럽다. 야당의 폭주는 더 심각하다. 지난 4·13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에 대한 오독(誤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패거리다툼에 신물이 나서 비토한 표심을 자신들에 대한 절대지지로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권력을 거머쥐기만 하면 오만방자해지는 정치꾼들의 고질병에는 약도 없는 모양이다. 불통이 만사지액(萬事之厄)이 돼버린 정부여당에 대한 민심의 회초리질을 아전인수로 해석한 야권의 득의양양은 순간적인 상황반전의 화근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 냉엄한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무릅쓰는 어설픈 심사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국을 헤쳐가기 위해서는 새누리당부터 바뀌어야 한다. 매듭을 푸는 일은 여소야대의 구도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논란, 김재수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까지 삼각파도에 휩쓸린 청와대를 돕는 길은 역성들기 외길에만 있지 않다. 사라진 정치를 복원할 막중한 책임이 정부여당에 있다.
내년 말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에 초점을 딱 맞춰놓고 `반대를 위한 반대` 습성과 포퓰리즘에 쩔어 있는 야권도 민생을 세세히 헤아리는 정치로 패턴을 돌려야 한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골수 지지자들의 박수만 탐닉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음을 깨우쳐야 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 삶을 돌아보지 않는 정치에는 미래가 없다. 민심의 바다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