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치관이 바뀌어야 할 부분이 있다. 거추장스럽고 소모적인 것은 시대에 맞게 변용되어야 한다.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도 당연하다. 다수의 정서에 빠르게 움직여야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변 상황을 빙자하여 고유의 전통을 과소평가하거나 낡은 인습으로 치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품위 있고 격조 높은 삶을 추구해 왔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만족도에 질량을 느꼈었다. 이런 정신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꺾이지 않는 힘의 원천이 되었고, 역사의 가시덤불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뎌온 버팀목이었다.
불필요한 부분은 걷어내되, 바탕에 흐르는 정신은 살려야 한다. 정신은 형식을 존중하는데서 출발한다. 밖에서 갖춰지는 엄숙한 형식은 안으로의 마음을 여물게 한다. 마음 안에서 정성이 일어나게 만든다. 우리 선조들은 제물은 주과포혜뿐이라도 격식을 따졌다. 물질은 빈약해도 예를 소중히 여기는 올곧은 사고를 지녔었다. 말씨 하나에도 격조를 찾았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품위를 지켰다. 서릿발 같은 자존심은 우리 민족을 지켜온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다.
몇 년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튿날 신문 일 면에 엘리자베스의 생일상이 화려한 색상으로 보도가 되었다. 궁중의 예법을 좇아 격식을 갖춘 생일상을 바라보며 감동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신문은 생일상을 진두지휘한 조옥화 여사와 하회 류씨 종부의 애국심을 기리는 덕담으로 메워졌다. 영국의 신사도에 맞서는 우리의 선비 문화에 자존감이 인 것도 빼놓을 수가 없었다. 하회 마을에서 전통문화로 손님을 맞이한 정부의 지혜는 보는 이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하회 마을에서의 생일상이 그분을 감동시킬 최상의 프로젝트였을지 모른다. 서울의 명동이나, 포스코, 대덕 연구 단지 등은 엘리자베스의 환심을 사기에는 미덥지 않다. 그녀의 눈이 그 이상으로 세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이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흔들기가 어려운 것은 고령의 여왕이 얼마나 지구촌을 누볐겠는가.
종요로운 상황에서 전통문화가 요긴하게 쓰였다. 동방의 문화가 숨 쉬는 생일상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취한 여왕의 함박 미소는 우리 문화의 수준을 웅변해 준다. 누가 뭐래도 두 분은 애국자임에 틀림없다. 생일상은 전통문화의 진실한 표백이었고 효과적인 홍보 콘텐츠였다. 앞으로 인터넷을 통해 하회 마을을 찾는 지구촌의 방문객이 한꺼번에 몰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흥분으로 설렜??마음이 금방 가라앉았다. 오히려 그 마음자리에 슬픈 감정이 일어났다. 미래에 엘리자베스 3세가 한국을 찾을 때는 누가 생일상을 차릴 것인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서구의 가치가 우선시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밀려난 전통문화의 현주소는 이런 사정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급할 때는 선조가 남긴 문화를 기웃거리면서 이를 소중하게 전해 주려는 기성세대도, 계승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도 눈에 띄질 않는다.
유대 겨레가 수억의 아랍권에서 아니, 이 지구상에서 큰 소리 치는 것은 온전히 문화의 힘이다. 그들은 자기네의 고유문화로 유대의 끈을 단단히 죄고선 끊임없이 외면적 능력을 키워 나간다. 탈무드와 성경은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만든 지혜의 지침서이자 삶의 교과서이다. 안으로는 탈무드와 성경 읽기를 실천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일깨우고, 밖으로는 국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지적 교육에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다.
우수한 인재를 가진 민족이 힘 있는 나라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고, 세계적인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그 민족이다. 칼 마르크스, 로버트 위너, 레오 칠라드, 스피노자가 또한 그렇다. 노벨상의 상당수를 그들이 차지했다. 세계의 심장부에는 유대인이 있었고, 그들은 지구촌의 실질적인 조정자였다.
퇴색되어 가는 전통문화를 바라보다 유대 겨레가 생각남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