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관직수행 능력과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이상적인 관료 상으로 의정부에서 뽑은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을 살아있을 때는 염근리(廉勤吏)라 하고 죽은 후에 청백리(淸白吏)라 불렀다.
정조의 홍재전서에 기록된 고식(故寔)은 조선후기의 학자인 김희락(1761~1803)의 시문집으로 정조에게 본받을 만한 옛날 고사를 아뢴 내용이 적혀있다.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청백리인 황희(1363~1452)가 각료의 모임에 갈 때 호조의 관원이 그가 추울까 걱정되어 율무죽을 드렸다. 그러자 황희가 말하길 `호조에서 어찌 재상의 아문에 음식을 지급하는가. 장차 논계하여 정배시키겠다`라고 적고 있다. 율무죽 한 그릇이 호조의 예산에 별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이를 물리치는 것으로도 부족해 정배까지 하겠다고 했으니 어찌 보면 지나칠지 모르나 임금을 보좌하여 국가를 경영하는 시초에는 청렴도에 이와 같이 기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준 사례이다.
또 다른 기록은 세종 때 탐욕스러운 중앙 관원이 공무 차 지방에 내려와 대놓고 뇌물을 요구한 기록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자리에서 가죽신 만들 재료를 요구한 이 관원에게 수원교관으로 있던 변구상이란 자가 큰 소리로 말하길 `당신 얼굴에 소 아홉 마리 분의 가죽신 재료가 있다`고 일침을 줬다라고 적고 있다. 사람이 탐욕에 눈이 멀면 낯가죽이 소 아홉 마리 분량만큼 두꺼워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전통적 사회윤리가 실종된 오늘날 공직을 이용해 목마를 때 물을 마시듯 재물을 탐해 불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온당한지 불법인지를 전혀 따지지 않는다면 그 심성이 도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조선시대는 관원의 뇌물수수에 대한 처벌이 엄격했다. 관원이나 이전(吏典)이 뇌물을 받으면 받은 장물을 계산해 처벌했으며, 관원은 관직과 작위를 빼앗고 관원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했으며 이전은 직역을 그만두게 하며 부정으로 벼슬을 잃은 사람에게는 다시 관직을 주지 않는 법이 시행되었다. 조선이 수용한 대명률(大明律) 조문을 보면 관원이든 이전이든 뇌물을 받으면 파면했다. 뿐만 아니라 받은 장물의 양을 합산하여 그에 따라 태형이나 장형의 처벌을 받으며, 장물이 많으면 최고 수위인 교수형에 처해졌다. 관원의 부정부패에 대하여 오늘날보다 더욱 엄격하게 다뤘음을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뇌물을 받겠다는 의사표시만 하여도 수장죄(受贓罪)로 처벌하였다. 또 법규를 어기고 받았는지, 법규는 어기지 않으면서 받았는지, 일이 다 끝난 뒤에 받았는지에 따라 왕법수뢰(枉法受賂), 불왕법수뢰(不枉法受賂), 사후수뢰(事後受賂)로 나누어 처벌하였다. 이들 죄인은 국가에서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릴 때도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관원들에게 신규 관원 대상자를 추천하게 했는데, 만약 추천된 자가 재직 중에 뇌물을 받으면 추천한 자까지도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다. 뇌물수수로 처벌받은 관원의 아들과 손자들은 모든 관직에 임명될 수 없었다.
3· 5· 10이란 28일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의 한도를 식사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을 일컫는 말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못한 비정상이 정상화되어 깊이 뿌리내린 고질적인 청탁문화가 이 법 시행을 앞두고 나라경제까지 휘청거린다고 요동친다. 조선 후기 박종채 선생은 과정록(過庭錄)에 `공직에 있는 사람은 비록 내일 떠나더라도 항상 백 년 동안 있을 마음을 가져야 하니, 그런 뒤에야 백성을 안정시켜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자신을 속이며 공직에 있으면 그 사회는 결국 병들어 나라까지 쓰러진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