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뷰(Dejavu:旣視感) 현상인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디선가 맞닥뜨렸던 상황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지난 9일 새누리당 대표에 당선된 호남출신 이정현 대표가 취임일성으로 “이 순간부터 새누리당에는 친박·비박을 포함한 어떤 계파도 존재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고 말할 때 였다. 2011년 12월7일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당시 쇄신파인 권영진 의원과 비공개로 만난 자리에서 “친박(친박근혜)은 없다”고 말했다. 당시 친박계와 쇄신파는 당 쇄신 방향을 두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친박계도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행보에 발맞춰 2선으로 퇴진했다. 친박계 의원모임인 `여의포럼`이 해체됐고 그 당시 박 전 대표의 `입` 역할을 해온 이정현 의원도 `대변인격(格)`이란 직책에서 물러났다. 그런 후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당의 전면에 나서 2012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19대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같은 해 8월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돼 12월 치른 대선에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이 됐다.
어쨌든 새누리당 신임대표가 당의 고질적 병폐인 계파주의를 청산하겠다니 크게 반길 일이다. 문제는 이게 당 대표의 선언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그동안에도 백약이 무효였다. 사실 정치판에서 특정 정파 혹은 계파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문제는 우리에게 좌파와 우파, 진보파와 보수파, 또는 매파와 비둘기파 등과 같은 이념이나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파벌이 형성되지 못한 데 있다. 우리에게는 `상도동파`나 `동교동계`라는 정치파벌이 아직도 익숙하다. 이런 파벌 보스들의 좌충우돌이 곧 정치가 된다. 그 결과 노선의 차이가 계파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계파가 노선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비극이 반복된다.
이같은 계파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바로 보스 지상주의다. 계파 우두머리의 말씀이 곧 법이요, 진리다. 모든 길은 그에게로 통한다. 예를 들면 DJ가 야당총재로 있을 때 바로 그 밑에는 “선생님이 숨을 쉬라고 하니 숨을 쉰다”던 사람들이 적지않았다니 쉽게 짐작이 간다. 새누리당내 골수 친박계 의원들의 몸짓과도 닮아 보인다. 선진국 정치에서 파벌 혹은 정파간 대결은 우리와는 자못 다른 양상이다. 상대를 비판하는 가운데도 위트와 유머가 넘친다. 영국의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은 서로가 앙숙이었다. 둘 다 재상을 지내긴 했지만 앞사람은 보수당 소속이었고, 뒷사람은 자유주의자였다. 한번은 디즈레일리에게 `불운과 재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디즈레일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를테면 글래드스톤이 템스 강에 빠졌다고 하면 그것은 불운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강물에서 구출된다면 그것은 곧 재난이 될 것입니다.” 필생의 정적을 상대할때도 이런 유머를 날리며 대응하는 정치문화라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정현 대표가 `친박은 없다`고 그리 목소리 높일 일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친박계의 쇠락은 이제 역사의 필연이기 때문이다. 한때 친박계보다 셌던 친이계는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총선을 거치며 친노(친노무현)는 사실상 사라지고 친문(친문재인)만 남았다. 이제 친박도 그렇게 사라져갈 것이다. 한때 `박사모`로 뜨거웠던 대구·경북지역 민심도 어느새 싸늘해졌다.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룬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자, 부모를 모두 총격에 잃은 `비운의 공주` 박근혜에게 느끼는 부채의식도 대통령 당선으로 갚았다 여기는 지역민들이다. 오히려 영남권신공항 무산, 사드체제 성주배치, 원자력해체연구센터 유치무산 등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어쨌든 공천이나 당직을 놓고 자기들끼리 코피터지게 싸우는 친박·비박 패거리의 모습은 사라지고, 민생문제를 놓고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새 정치세력이 나타나길 바라는 게 나뿐만은 아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