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자 할머니는 산후조리에 좋다는 늙은 호박을 고며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
“이 더위에 딸을 낳아 가지고….”
그늘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나는 판에 반갑지 않은 손녀가 태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할머니의 심사에도 열불이 피어올랐으리라. 내 위로 오빠가 셋 있는데도, 육이오전쟁 통에 작은아들을 잃어 아버지가 외아들이 된 터라 할머니는 손자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채 이 세상에 여름나들이를 나왔다.
몇 살 때였는지 아슴푸레하다. 아버지는 친지들과 포항 송도해수욕장 나들이에 나와 작은오빠를 데리고 갔다. 어른들은 먹고, 마시고, 내기를 즐겼지만 동무가 없는 나는 마땅히 할 놀이가 없었다. 오빠는 가끔씩 바닷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다가 나오곤 했지만 나는 물이 무서워 그마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뜨거운 모래와 북적이는 사람들이 싫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천막에서 먼 눈길로 하늘빛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개봉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파도 따라 교차하며 철썩거렸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한 유일한 여름나들이였다.
그 시절, 시골 사람들에게는 약물탕 가는 게 중요한 여름나들이에 속했다. 비지땀을 흘리며 콩밭을 다 매고나면, 맑은 날을 택하여 약물탕엘 갔다. 객수(客水)가 들면 맛도 없어질뿐더러 약효도 떨어진다 하여 비 오는 날은 피했다. 약물을 신령한 처방약으로 믿었던 것 같다. 체증이나 장염 같은 내장의 병은 약물을 먹어서 다스리고, 땀띠나 종기 같은 피부의 병은 약물을 맞아서 치료했다. 한여름 논밭 일에 탈진한 몸으로 받아들이는 물은 더욱 시원하고 달았으리라.
외갓집이 있는 마을의 약물탕에 갈 때면 엄마와 함께 하는 즐거움에 촐랑거리며 따라다녔다. 약수를 맞고 온 뒤, 어머니 등에 났던 땀띠가 스러진 걸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여름나들이로 한숨 돌리게 된 어머니가 짓던 희미한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몇 살 때였는지 역시 어렴풋하다. 여름날 해 질 무렵이었다. 외할머니가 사립문을 밀고 들어왔다. 마당에 내놓은 평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평소 `옴마니반메훔`을 읊조리곤 하던 할머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외할머니와 함께 양동마을 `심인당(心印堂)`에 밤나들이를 갔다.
나는 골목을 쏘다니며 옥수숫대나 탱자나무 울타리에 앉은 풍뎅이를 잡거나, 풀숲에 숨은 반닷불이를 손 안 가득히 잡았다. 꼬물거리고 반짝이는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에 도취되었다가 날려 보내는 아쉬움을 무제한 즐겼던 것 같다. 그게 만남과 헤어짐의 전주곡이었음을 까맣게 모르고 지냈다.
평상에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은하수가 흐르고 생풀을 베어 지펴놓은 모깃불에서는 매캐한 연기와 알싸한 향(香)이 풍겨 나와 여름밤 마당에 깊숙이 드리우곤 했다. 심인당에 갔던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늦은 밤에야 담 모퉁이를 돌아 사립문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할머니들은 그 여름밤 길동무가 되어 새로운 길나들이를 준비했던 것 같다.
삶은 나들이의 연속이다. 외할머니, 아버지, 할머니가 순서 없이 이 세상나들이를 끝냈다. 여러 해 전 어머니마저도 나를 낳은 날짜, 사흘 지나서 훌쩍 먼 나들이를 떠나고 말았다.
올여름도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렀다. 여름에 만난 인연은 가을이 오기 전에 헤어지고 마는, 어쩌면 여름은 슬픈 계절이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여름이 또다시 나를 버려두고 나들이를 떠나려는 태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