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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

등록일 2016-08-11 02:01 게재일 2016-08-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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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종 오
경부선 마지막 고속철이 떠난다

역전에서 어슬렁거리던 사내들이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거나 퉤 뱉었다

주차장 가드레일에 나란히 앉은 한 무리는

옆 사내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저마다 제 말만 많이 하려고 목청을 높였다

대합실 불빛은 멀리 비치지 않았다

어둑한 구석바닥에 둘러앉은 다른 무리는 지쳤는지

어떤 사내는 소주병을 잡은 채로 졸고

또 어떤 사내는 소주 한 잔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로 무얼 했느냐고 전직을 묻지 않는다

서로 어디서 살았냐고 고향을 묻지 않는다

차도에서는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고

빌딩 옥상 전광판에는 광고 자막이 번쩍거렸다

그 아래 침침한 지하도에서는

얼굴이 불콰해진 체구 큰 중년의 남자가

왜소하고 좀 늙은 남자를 두들겨 패고 있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라는 시에는 타향을 떠돌다 귀향하는 인생의 그리움과 회한과 눈물이 있지만 이 시에는 그런 낭만적 분위기는 없다. 철저하게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번민이 짙게 깔려 있다. 누가 무얼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그저 무관심할 뿐이다. 파편화되고 깨져버린 관계들에 대한 따가운 시인의 인식이 진하게 녹아 있다. 시리고 아프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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