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短詩, 짧은 울림 긴 여운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6-08-05 02:01 게재일 2016-08-0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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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박성우·신용목 엮음창비 펴냄·시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 신경림 시`농무(農舞)`

1975년 신경림의 `농무`를 시작으로 40년 동안 한국시단의 중심을 지켜온 창비시선이 400번을 맞아 기념시선집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창비)를 출간했다.

박성우·신용목 시인이 창비시선 301번부터 399번까지 각 시집에서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따라 읽을 수 있는 시 한 편씩을 선정해 엮은 책이다.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경우 그 중 한 권만 택해 수록했기에 총 86편의 시가 실렸다.

엮은이들은 선정 기준에 대해 “이를 두고 단시(短詩)라고 불러도 좋고 한 뼘 시나 손바닥 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 독자들이 가능한 한 여유롭게 시와 마주 앉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짧은 시가 쉽다는 뜻이 아니라 가파른 길을 짧게 나눠서 걸어가면 어떨까 하는 기대 말이다”라고 밝힌다.

창비시선은 첫 시집 출간 이래로 인간을 향한 애정과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정신을 견지해왔다. 창비시선의 시집은 사람과 삶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 어떤 시선보다 독자와 함께하는 소통을 우선시해왔다. 한동안 위축돼 있던 문학시장이 조금씩 활기를 띠고 있는 지금, 시와 독자가 만나는 지점을 다시 고민하는 것이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의 기획의도다.

신경림`농무`, 고은 `새벽길`, 곽재구 `사평역에서`, 김용택 `섬진강`, 조태일 `국토`, 박노해 `참된 시작`,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문태준 `맨발`,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등 창비시선의 주요 시집은 독자들의 뜨겁고도 꾸준한 사랑을 받았으며, 시대의 목소리를 담보하면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해왔다.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역시 오늘날 한국 시단을 이끌어가고 있는 다양한 시인들의 면모를 담았다. 고은 신경림 김용택 도종환 김사인 나희덕 장석남 정호승 이영광 함민복 문태준 진은영 송경동 등 각자의 개성과 성취가 뚜렷한 시인들의 절창과 강성은 이제니 김중일 이혜미 주하림 신미나 안주철 박소란 안희연 박희수 등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인을 소개하는 시편을 고루 포진한 것은 이번 시선집의 특징인 동시에 전세대의 목소리를 모두 담아온 창비시선의 자랑이다.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짧은 시를 읽음으로써 독자들은 난해하게만 여겨졌던 시에 한결 가깝게 다가가고, 짧기에 전해지는 또다른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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