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로 무과(武科)시험을 봤던 그 현장에서 국군은 무장해제됐다. 그 3년후인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한다. 나라가 없어졌다.
1950년 6월 25일을 며칠 앞둔 어느날 3·8선 부근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고, 고급 지휘관들의 인사가 단행돼 어수선했다. 25일은 일요일이라 장병들은 대거 외출·휴가를 갔고, 몇몇 전방 지휘관들은 24일 밤부터 새벽까지 술판을 벌였다. 당시 주한 미군은 철수를 단행하고 “한반도는 미군의 방위선 밖에 있다”란 해리슨 선언이 나온다. 최전방은 `완전한 무장해제 상태`였다. 당시 남한에는 `남로당`이라는 공산주의 세력이 조직돼 있었다. 이 `완벽한 여건`을 만들어놓고 북한군은 선전포고 없는 불법 남침을 감행한다. 낙동강까지 밀리는데는 단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외교에 노회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대응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그대로 적화통일 `해방구`가 됐을 운명이었다.
`제3의 무장해제`획책하는 세력이 있다. 북한의 핵무기를 우리는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 “북한핵은 남한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며 `연막`을 피우는 세력이 있다. `사드 배치`는 북핵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데, 중국은 이것을 뒤집어 “사드 배치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더 부추겨 한국을 더 큰 위협 속에 몰아넣고, 중국과 러시아의 보복을 부를 것”이라며 `한국의 무장해제`를 종용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적화통일`이 `우리의 소원`일 것이다. 이러니 사드를 정략적으로 악용하는 세력들이 핏대를 세운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