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이전의 해들보다 무척 덥고, 지구촌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불행한 이야기가 더 많은 요즈음이다. 내일은 또 무슨 상상도 못할 일이 생겨나서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할지 불안한 가슴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한다. 인터넷 덕분에 전 세계의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하는 우리 시대의 불행인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변화만 해도 어찔한데, 인심의 변화까지 감당해야 하다니.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격심한 변화를 몸소 겪었던 폴 발레리(1871-1945)는 `중단, 불일치, 놀라운 일은 우리 삶의 일상적인 조건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이러한 조건들을 꼭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의 정신은 갑작스런 변화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자극 (….) 이외의 것들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일상이 비상의 사태가 되고, 비상의 사태가 일상이 되어버린 근대 사회의 비정상적인 변화를 두고 시니컬한 어조로 표현해 내고 있다.
한 세기 이후를 사는 우리들도 이전 시대와는 또 다른 형태의 중단, 불일치, 놀라운 일 즉 비상사태에서나 볼 법한 일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영국 리즈대학 명예교수인 지그문트 바우만(1925~)은 액체근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세 가지 조건 속에 내던져진다는 것이라고 했다. `첫째,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둘째, 예측하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결코 측정되지 않는 지속적인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한다. 셋째, 신뢰의 위기 속에서도 과감히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발레리처럼 시니컬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과감한 행동을 요구하는 차이를 가진다. 그가 고안해 낸 액체근대라는 용어를 쉽게 설명해 보면, 커다란 공장 안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일을 하는 시대를 근대 중에서도 고체근대라고 일컫고, 커다란 건물도 수많은 인력도 필요 없이 항시 액체처럼 그 모습을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는 시대를 액체근대라고 명명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사는 시대는 컴퓨터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과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시대인 만큼, 큰 공장과 거대한 기계, 불평 많은 노동자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액체근대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 같다.
바우만은 `액체근대`(2000)라고 하는 책에서 불확실하고 위험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개인의 어깨에 지워진 책임의 무게를 넘어, 자기결단과 해방의 자유, 거대한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 공동의 노력을 향한 책임의 `통각`을 길러야 함`을 역설한다. 그는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 등 인간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을 치밀하게 점검하는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또 “시인이 글을 쓴다는 것은 `항상 거기 있는` 그 무언가를 뒤에 숨긴 벽에 부딪힘을 의미한다”고 한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어 사회학적 글쓰기의 지향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의 말대로 외국인혐오, 인종편견, 희생양, 차이에 대한 이해 부족 등에 대해 선입관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사회학의 임무라고 한다면, 사회학적 글쓰기는 그런 편견들이 가지고 있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불행한 소식들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단일민족의 신화를 벗어난 우리들은 리차드 세넷의 말처럼 `공동체의 이미지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갈등은 차치하고, 차이점을 느끼게 할 만한 모든 것을 깨끗이 정화한다. 우리라는 느낌, 비슷해지려는 욕망을 표현한 이 느낌은 인간이 서로를 더욱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게 해주는 하나의 방편`이 되면 안 된다. 진정성과 상호이해에 기반을 둔 공동체 형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