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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배신? EBS의 배신!

등록일 2016-07-21 02:01 게재일 2016-07-2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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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우연하게 채널을 돌리다가 한 아이의 손가락을 보게 되었다. 도저히 여중생의 손가락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르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채널은 고정되어 버렸다. 그리고 입으로는 “어떻게, 어떻게”라는 말이 반복되었다. 가위눌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영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화면에는 핏기 하나 없는 여중생의 모습과 함께 아이의 말이 자막으로 나왔다. “하루에 내신 공부만 열 몇 시간씩 했어요.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요. 이면지에 써서 요약정리를 하고 안 보고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써요. 안 그러면 마음이 안 놓여요.” 자막이 끝나고 다시 볼펜에 짓눌린 아이의 손가락이 나왔다. 볼펜을 받쳐 든 중지의 살점이 뜯겨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쓰라린데 아이는 이를 악물고 쓰고 또 쓰고 있었다. 아이의 책상 정면이 화면 가득 들어왔다. 그곳에는 힘이 가득 들어간 아이의 목표가 적혀 있었다. 목표는 다름 아닌 전주에 있는 자사고 입학이었다. 아이는 자사고 입학을 위해 손가락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교과서를 외우고 또 외운 것이었다. 하루 종일 아이가 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공부뿐이었다. 물론 아이는 전교에서 최상위권에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늘 불안해했다. 아픈 손으로 아이는 수학 문제를 풀고 또 풀었다. 그 모습 위로 내레이션과 함께 다시 자막이 나왔다.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누구 하나는 문제 하나를 더 풀고 있겠지. 한 학년은 육백 명에 육박했고, 다들 학원을 너덧 곳씩 다니는데다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괴물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절박했다. 나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내 집안 형편이 미워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만 만족할 줄 아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는 현실을 증오했다. 그래서 더 죽도록 공부했다.”

누가 이 글을 십대의 글이라고 할까. 이 아이는 죽도록 공부해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첫 수학 시험에서 하위권 성적을 받았다. 아이는 괴물들이 득실대는 이 나라를 얼마나 증오했을까. 그리고 자신의 부모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등을 생각하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프로그램 제목은 공부의 배신인데, 왜 갑자기 집안 형편이 나올까?` 그래서 다른 연작들을 찾아서 보았다.

다른 회(回)에서는 성균관대, 서강대, 서울대 등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다니는 대학생들이 나왔다. 이들로 말하자면 위의 여학생이 죽도록 공부하는 이유인 학생들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부모들이 당신 자녀의 미래상으로 바라는 학생들이다. 더 나아가 괴물이 득실거리는 이 나라 학교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들들 볶는 근원적인 이유들이다. 필자 또한 예전에 그랬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출세하고 싶으면 죽도록 공부해서 IN서울 하라고.

화면 속 대학생들은 하나 같이 너무도 힘들어 했다. 성균관대학교에 다니는 여대생은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서강대학교 졸업반인 학생은 취업이 안 되어 결국 낙향하였다. 이 학생들의 생각을 대변하듯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 기회(부모의 경제력 등)를 갖지 못한 거고 세상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필자는 손가락이 짓무르도록 공부하던 여중생과 `공부의 배신`에 출연한 대학생들의 말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건 다름 아닌 성공의 조건이었다. 이들 학생들이 말하는 성공의 조건은 바로 부모의 능력이었다. 이들 학생들은 비록 자신들은 열심히 공부했지만 부모가 무능력해서 자신들은 이 사회에서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웃기는 건 그것을 EBS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학생들을 무의미한 공부로 꽁꽁 묶어 둔 것이 EBS라는 것을 안다면, `공부의 배신`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얼마나 웃기는지 이해할 것이다. 정말 공부의 배신이 아니라 EBS의 배신이다. 방학, 과연 우리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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