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온갖 소리를 내지른다. 기말 시험이 끝난 교실은 아이들 괴성으로 귀청이 떠나갈 듯하다. 아이들의 이 해방감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곧바로 여름방학 학원수업이 이어지고 다음 2학기 시험이 눈 깜짝할 새 닥칠 것이다. 학부모들은 이 괴성의 의미를 잘 모른다. 시험 치르는 아이들의 표정이 어떤지, 손톱을 물어뜯고 코를 킁킁거리고 발을 떠는 아이들, 앞으로도 수년간 이어질 아이의 강박과 불안을 부모들은 체감하지 못한다.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학교 교육을 비판한다. 과도한 학습과 사교육을 모두가 비난한다. 그런데 모든 국민이 비판하는 이 교육이 왜 바뀌지 않을까? 모든 국민이 이건 옳지 않다는데도 말이다. 감히 말하건대 질문의 방식과 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학교에 오래 있은 나는 말할 수 있다.
지금 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다. 좀 과격하게 말하면 학교는 석차를 결정하는 시험 장소일 뿐이다. 누군가 10등으로 올라가면 또 누군가는 10등에서 내려와야 하는 제로섬 게임에서 학교 공부란 석차 순서 놀음일 뿐이다. 그런데도 학생과 학부모들이 이 지옥 같은 학교경쟁을 견디는 이유는 소위 `좋은 대학`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좋은 대학 가지 못하면 생존을 위협받는 한국사회에서, 모두가 학교 석차에 목매는 것은 당연하다. 대학 이름 자체로 로스쿨 당락이 결정되는 사회처럼, `좋은 대학` 가지 못하면 `좋은 직장` 구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그리고 대학 가지 못하면 비정규직 노비로 평생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누가 학교 석차경쟁에 모든 것을 걸지 않겠는가. 조선조 양반들이 그들만의 부와 권력을 확장할 때 모두가 양반이 되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다.
자녀와 부모 모두 이렇게 학교경쟁에 몰입하는 것은 지금 학교석차에 뒤처지면 `내 아들`이 구의역 지하철 노동자로 일하다 전동차에 치여 죽게 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지금 학교에서 옆의 친구를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내 딸`이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김군처럼 하루 5시간도 못 자고 노동착취를 당하다 죽음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 교육문제는 `정직한 노동 임금`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학교 석차보다는 사회노동이 대접받아야만 지금의 학교경쟁 압력을 줄일 수 있다. “엄마, 나는 공부가 체질에 맞지 않아요. 다른 일하면서 살아 갈래요”라는 아이에게 “그래,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으니까, 학교에서는 친구와 즐겁게 지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일한 만큼 공정한 대가가 주어지는 사회, 즉 노동임금이 정직한 사회가 되지 않고는 지금 경쟁교육을 해결 할 수 없다. 구의역 지하철 노동자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대학 진학을 꿈꾸다가 죽는 사회가 아니라, 특성화고 실습생 김군이 대학 진학을 위해 살인적 노동착취를 견디다 죽는 사회가 아니라 즉 대학이 아니라 `지금-이곳의 일자리`가 정의로워야 한다. 그들 청춘이 죽은 바로 그 자리를 내 아들 딸이 다녀도 될 만한 사회로 만들지 않는다면, 이 지옥 같은 학교 경쟁도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교육을 비판하고 싶은 사람들은, 학교가 아니라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이 대접 받는 사회를 말하면,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지금 힘든 건 학교 다닐 때 네가 공부 안 했기 때문인데 누굴 탓하느냐!”며 이를 사회 윤리와 정의로 내세운다.
그런데 이 말만큼 우리사회의 노동 천시를 보여주는 것이 또 있겠는가. 이 말은 우리가 학교에서 노동(자)의 가치와 권리를 학습한 적이 없다는, 우리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
부와 권력을 틀어쥔 조선조 양반들이 일하는 사람들을 천시했던 것처럼, 일하는 사람들을 천하게 여기는 언어는 요즘도 넘쳐난다. 그리고 그 `양반의 언어`를 내 것으로 충직하게 학습한, 바로 우리의 어긋남이 우리 교육병폐의 뿌리이다. 그러니까 이 차별의 언어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경쟁교육을 그렇게 쉽게 비판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