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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완장` 잔혹사

등록일 2016-07-05 02:01 게재일 2016-07-0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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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휘<br /><br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칠월칠석으로 날을 잡아 우물곁에 포장이 쳐진다. 깊은 우물 속으로 마을 장정과 물동이와 삽 따위의 도구들이 차례로 밧줄을 타고 내려간다. 이윽고 1년 내내 우물 안에 쌓인 오물과 흙탕물이 물동이에 담겨 올라와 버려진다. 포장에서는 이웃들이 국수도 삶고 막걸리도 마시며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옛날, 온 동네가 우물 하나를 식수로 쓰던 시절의 `우물 청소하는 날` 정경이다.

국회의원들이 한 묶음으로 싸잡혀 `세금도둑`으로 몰리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의 행태는 악덕 기업가의 목불인견(目不忍見) 갑질 행패마저 닮아있다. 비서관·보좌관을 친인척으로 채우는가 하면, 일부 보좌진들에게는 `꺾기` 형식으로 봉급을 잘라 바치게 했단다. 200여 가지 국회의원들의 갖가지 특권들도 일일이 입줄에 오르고 있다.

`친인척 보좌진 채용 금지` 의견에 각 정당들은 한 목소리다. 회기 중에는 체포되지 않는 불체포 특권을 내려놓을 때가 됐다는 주장에도 동의를 보태고 있다. 국회에서 한 발언에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한 면책특권에 대해서는 소신발언이 원천봉쇄돼 국회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는 우려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최근 정치권 현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대중의 `우상파괴` 심리를 읽어야 한다.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경제불균형 현상이 가팔라지면서 사람들은 `평등` 문제에 점점 더 관심을 키워가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무던히 견뎠던 불평등에 대해서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13년 남양유업의 대리점 갑질 사건과 2014년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이 시작이다. 몽고식품 김만식 회장의 운전기사 폭행, 대림산업 이해욱 부회장·MPK그룹 정우현 회장·현대 비앤지스틸 정일선 사장의 갑질 행태 폭로 등이 잇따랐다. 전자통신의 발달로 인해 지도층의 그 어떤 일상도 완전히 숨길 수 없게 된 세태의 여파다. 모다깃매를 맞고 고개를 숙인 더민주당 서영교 의원 역시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여기고 억울해한다. 이 나라에서 적발된 범죄에 대해 당사자나 주변사람들 모두 `잘못했다`는 생각보다는 `재수 없다`고 여기는 일은 이미 오래된 기현상이다. `낡은 완장`을 차고 휘두르다가 개망신을 당하는 잔혹사는 좀 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정세균 국회의장과 여야 3당 원내대표의 의장직속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자문기구 설치 합의는 진일보다. 그러나 이 정도로 정치권이 정말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난센스다. 미국은 보좌관 채용법에 `족벌주의(Nepotism)`라는 항목이 있어 친·인척의 보좌진 고용과 보좌진의 선거운동 업무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영국은 지난 2009년 기저귀 값 전용에까지 뻗친 국회의원들의 엄청난 수당 남용이 폭로된 `의회지출 사건`으로 142명의 현역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권까지 바뀌는 소용돌이를 겪었다. 의회·정부·정당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영국의 `독립의회윤리기관(IPSA)`은 웹사이트를 통해 모든 의원들의 수당신청 내역을 시시콜콜 다 공개하고 있다.

국회개혁의 초점은 독립성을 가진 윤리기관의 설치 여부다. 국회 내의 윤리기구는 그 어떤 정치인 부조리도 제대로 척결한 역사가 없다. 왜 그럴까?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권에서 운위되고 있는 그 어떤 혁신안도 `완전히 독립적인 윤리기관` 설치로 귀결되지 않는 한 위기국면 타개를 위한 `꼼수`에 불과할 것이다.

정치인들은 이제 `낡은 완장`을 힘차게 벗어던져야 한다. 태풍은 지나가리라 하고 복지뇌동(伏地腦動)하면서 대형이슈가 `특권` 논란을 잡아먹길 기다리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지금 `우물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공동체의 건강이 정말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미국도 하고 영국도 하는데 우리라고 왜 못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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