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꽃이 피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훌쩍 여름으로 치닫는다. 조금 더 있으면 휴가철이다. 요즘 같은 어려운 경제상황이라면 언감생심 어디 여행을 꿈꾸기야 하겠냐만 그런 상황일수록 여행에 대한 갈망은 더 커져간다. 얇은 월급봉투에, 도시의 소음에, 익숙한 회색빛 콘크리트를 뒤로 한 채 훌훌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진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달려가느라 조급하고 긴장된 마음은 일상과 일탈의 경계선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방황하게 되고 반복적인 일상의 단조로움에 지치면서 여행의 욕구는 신열(身熱)처럼 찾아온다. 이 같은 `고달픈` 현실을 털고 여행지로 떠나기를 꿈꾸는 것이 여름을 맞는 현대인들의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우리는 왜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다른 일에는 회의적이고 신중하면서 왜 야자수와 에메랄드빛 바다 사진이 실린 팸플릿 한 장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여행의 기술` 등을 통해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며 현대적 일상의 가치를 탐구해온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현혹(眩惑)`이라고 표현했다.
알랭 드 보통은 출간된 지 10년 넘었지만 `여행서의 고전`으로까지 평가되는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이 주는 사고(思考)의 효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상생활 속의 우리는 (일상에 파묻혀)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으로 계속 존속되기 쉽다. 존재가치도 모르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늘 같은 일상이 일 단위, 주 단위로 반복된다. 여행은 이러한 일상을 떠나 좀더 `본질적인 나`를 만나게 도와준다. 그런 깨달음은 기차를 타고 가는 창 밖을 볼 때 가장 극명하게 작동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랜드 캐년이나 시나이 사막과 같은 거대한 대자연을 찾는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또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불가해한 인생사에서 상처받고 분노를 느낄 때 우리를 다독여주는 힘이다.
“숭고한 장소들(사막이나 대협곡 같은 대자연)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중략)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여행의 기술` 중)
이렇게 여행은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과 도착한 장소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해주며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존재를 깨닫고 인정하게 만들어준다. 히말라야는 인간을 바꿔버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행을 잘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뭘까?
가계에 파탄을 일으킬 정도로 많은 돈이 드는 긴 여행이 `열대의 바람에 살짝 기울어진 야자나무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보통이 바베이도스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여행의 기술` 마지막 장에서 `습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일상은 남루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습관적으로 길들여져 있고, 우리가 사는 `이곳`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 습관의 정도가 심했던 플로베르 같은 이는 그래서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을 외치면서 끊임없이 타지로의 여행을 갈구했다. 그러나 보통은 “우주는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맞추어져 있다(우주는 우리가 보고자 하는 방식에 따라 보인다는 뜻)”면서 주위의 일상에 관심을 가지고 찬찬히 훑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동네 골목길의 일상이나 자신의 침실에서도 여행은 가능하다며 이 책을 마친다.
하긴 그렇다. 여행이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면, 꼭 세상 밖으로의 여행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아스팔트 틈새에 자라나는 잡초 한 포기에서 우주를 보아낼 수 있다.
어디서든 마음 먹기에 따라 삶의 생동감과 일관성을 얻을 수 있는 사유(思惟)의 힘을 튼튼하게 하는 일부터 먼저 해봄직도 하다. 바깥으로의 여행만 여행인가, 내면으로의 여행도 훌륭한 여행이다. 그래서 성직자들, 성인들, 도인들은 명상을 즐겼다. 달라이 라마는 한 달을 줄곧 명상에 빠져 있을 때도 있다지 않은가. 아무리 뒤져봐도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나의 내면! 그것은 우주공간만큼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