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한강 지음난다펴냄·장편소설
이번 신작 `흰`은 그가 처음으로 “삶의 발굴, 빛, 더럽히려야 더럽힐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세상의 흰 것들을 응시하며 쓴 작품이다.
65편의 짧은 글로 이어진 이 책은 하나의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가진 소설이면서 동시에 각각의 글이 한 편의 시로도 읽힐 만큼 완결성을 지녔다. 문체도 산문과 운문이 교묘히 뒤섞인 형태다.
이번 작품은 특히 그가 그동안 인간의 폭력과 어둠을 파고든 것과 달리 생명과 빛, 아름다움에 주목한 것이어서 하나의 이정표 같은 느낌도 준다.
작가로부터 불려나온 흰 것의 목록은 배내옷, 각설탕, 진눈깨비 등 총 65개의 이야기로 파생돼`나`와`그녀`와`모든 흰`이라는 세 개의 부로 나눠 담겨져 있다.
“익숙하고도 지독한 친구 같은 편두통”에 시달리는`나`가 있다. 나에게는 죽은 제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언니`의 사연이 있다. 지난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이 어릴 때, 슬픔과 가까워지는 어떤 경험을 했느냐고.” 그 순간 나는 그 죽음을 떠올린다. “어린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짐승.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
나는 지구 반대편의 오래된 한 도시로 옮겨온 뒤에도 자꾸만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들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우연히 1945년 봄 미군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을 보게 된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도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깨끗이, 본보기로서 쓸어버리라는 히틀러의 명령 아래” 완벽하게 무너지고 부서졌던 도시, 그후 칠십 년이 지나 재건된 도시 곳곳을 걸으면서 나는 처음 “그 사람-이 도시와 비슷한 어떤 사람-의 얼굴을 곰곰이 생각”하기에 이르른다.
`흰`은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무력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벽을 모래로 허물고, 삶과 죽음이라는 단단함을 무르게 만들고, 삶과 죽음이라는 당연함을 낯설게 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평면을 입체로 분산시키고, 삶과 죽음이라는 유한을 우주라는 무한으로 확장시킨다.
이 책은 `채식주의자`를 번역해 맨부커상을 공동 수상한 데버러 스미스가 현재 번역 중이다. 내년 말 영국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