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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주남마을

등록일 2016-05-18 02:01 게재일 2016-05-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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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김 씨는 아까시 냄새에 재채기를 한다. 핸들을 잡은 손에 햇살이 내려앉는다. 졸음이 향기롭게 번져가는 버스 안, 봄빛이 환하다. 쪽잠 자는 여고생 숙이가 자꾸 뒤척이는 것도, 칼빈을 꼭 쥔 옆집 박 씨 손이 덜덜 떨리는 것도 거울로 다 보고 있다. 무서운 꿈이 저들을 짓누를까봐 김 씨는 재빨리 기어를 변속한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가슴도 함께 흔들린다.

도청 지나 광주천 옆을 달리자 물장구치는 아이들이 보인다. 물비늘 위로 언뜻 무지개가 비친다. 가족들과 소풍 앉던 자리에 싸리꽃이 고봉밥으로 부풀어있다. 김 씨는 마른 침을 삼킨다. 이제 화순이 가깝다. 잠 깬 숙이가 더께 낀 손으로 주먹밥을 먹는다. 기름도 안 바른 맨밥을 넘기다 체할까봐 김 씨는 천천히 액셀을 밟는다. `아야 싸목싸목 씹어 묵어라잉.`

주남마을 어귀, 아까시 꽃그늘 아래 무장한 군인이 경광봉을 흔든다. `아따 여그가 정류장도 아닌디 워째 버스를 세워분다요.` 큰소리로 뱉은 농담의 꼬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겁을 집어먹은 숙이가 딸꾹질을 한다. `아야 긍께 찬찬히 묵어라 안 했냐.` 김 씨 등에 맑은 땀이 흐르고, 거울 속 박 씨 눈망울이 도축장 소 마냥 끔벅거린다. `기왕 가는 먼 길 버스 타고 편히 가자고.` 김 씨가 삼단 기어를 넣고 힘껏 액셀을 밟는다.

`말간 하늘서 우박이 쏟아지는가….`

`아야 왜 그냐 밥 먹은 것이 체해부렀냐?` 허옇게 눈 까뒤집고 고꾸라진 숙이 품에서 피에 젖은 주먹밥이 굴러 떨어진다. 그걸 먹으려는 듯 입 벌린 채 엎드린 박 씨의 눈에 새카만 구멍이 뚫려 있다. 승객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뻘건 내장이 펄떡거린다. 피와 뇌수가 꽃처럼 흐드러진 버스 안, 탄약 냄새와 피비린내와 아까시 향기가 서로를 팽팽히 밀어낸다. 김 씨는 핸들을 놓지 않는다. 아직 화순에 닿지 못했다. 힘겹게 눈꺼풀 들어 거울을 보니 저 뒤에서 숙이가 제 동무와 손뼉을 치며 재잘거리고, 박 씨는 줄로 엮은 장닭을 옆구리에 낀 채 꾸벅꾸벅 존다.`오메 다들 종점까지 가능갑네.` 김 씨가 속도를 높인다. 꿈결보다 환한 버스 안, 아까시 냄새가 배추흰나비로 나풀거린다. 무등산 위에 걸친 구름 사이로 태양이 반사경을 반짝이고 있다. 낮별 총총한 종점이 가깝다.

1980년 5월 23일, 전남도청을 출발해 시외로 가던 미니버스에 탑승한 시민 17명이 광주 동구 주남마을에 매복해있던 계엄군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에 의해 살해당했다. 위 글은 그 사건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일종의 팩션(faction)이다. 몇 해 전에 시로 써둔 것을 산문 형식으로 풀어보았다.

오늘은 5월 18일이다. 호남, 영남 가를 것 없이 한국인이라면 올바로 기억해야하는 역사다. 폭동, 북괴의 사주 따위 궤변에 놀아나는 것만큼 어리석음도 없다. 부산과 마산에서부터 산불처럼 일어난 민주주의 열망이 광주에 옮겨 붙었다. 광주의 것만이 아니라 영남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아픔이자 긍지이다.

억지로 부정하는 자들이 문제지만, 광주의 것으로만 전유하려는 태도도 안타깝다. 명백한 사실이라도 전하는 방식이 거칠면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두고 또 시끄럽다. 그 노래의 맥락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웬만한 행사에서 애국가도 생략되는 요즘이라면 가급적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쪽으로 양보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광주 정신은 숭상하나 노래가 불편한 사람들도 있다. 5·18이 자꾸 이념논쟁거리가 되게 해선 안 된다. 모두가 편하게 발화하고 기념하려면, 주체 스스로 무게를 좀 덜고 빗장 몇 개쯤 풀어야 한다.

광주의 대표적 `창조마을`로 자리매김한 주남마을은 매년 5월이면 그날의 비극을 기리는 행사를 갖는다. 희생자 추모 중심이 아닌 치유와 평화, 성숙한 공동체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5월 18일의 참된 가치가 투쟁보다는 주먹밥과 식수를 나누고, 생면부지인 남을 위해 헌혈한 광주 사람들의 이웃 사랑과 개방적 자세, 오월 햇살처럼 따뜻한 그 휴머니즘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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