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 중 최고의 것은 무엇인가? 일반 사람들이든 위대한 사람들이든 모두 이것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행복감, 즉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행복할까? 돈과 여유가 생기면 행복감을 느낄까?
아날로그를 위협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서기 시작하는, 인간의 역할이 위축되고 있는 세상에서 온전하게 행복한 감정을 찾을 수 있을까? `가정의 달`이라 이름 붙여진 5월인데,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이 연이어 전해진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인터넷 및 스마트폰 중독이 심각한 수준이고 특히 청소년의 중독률이 성인에 비해 약 2배이상 높다고 한다. 최근 복지부와 미래창조과학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456만1천여 명이 스마트폰 중독인데 이 가운데 156만2천여 명은 청소년이라고 한다. 전체 청소년 인구의 29.2%다.
또 여기에 덧붙여,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 가장 많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얼마전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염유식 교수팀이 발표한 `2016 제8차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82점으로 조사 대상인 OECD 회원국 22개국 중 가장 낮았다.
무한한 잠재력의 소유자, 자연의 정복자이자 개척자, 끝없는 기술 발달로 영원한 생명까지 얻으려 발버둥 치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과 고달픈 삶 속에서 완전히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식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라는 수험생, 기적을 바라는 말기암 환자, 대권을 노리는 대선주자, 연인과의 달콤한 사랑과 결혼을 꿈꾸는 `선남선녀`들….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주변의 누군가에게, 아니면 절대적 존재에게 의지하며 간절한 소원을 청원한다. 인간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낱 약한 존재일 뿐이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스포츠 전문용어가 있다.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고통의 단계를 넘어 희열을 맛보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흔히 `마라토너의 희열`이라 불리지만, 반드시 마라토너만의 절정감은 아니다. 열심히 한 길을 달리다 보면 관성이 생기면서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법열의 순간`을 맞게 된다.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거나 남을 이겨야 한다는 승부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최고의 경지를 맛보는 순간, 그런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러너스 하이`의 경지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 경제가 한파에 웅크리고 있을 때도 삶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열정. 이런 것이 지금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또 하나의 희망이 아닐까.
당신은 인생의 진정한 `러너스 하이`를 맛본 적이 있는가. 진짜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 새로운 다짐을 해보자. 우리 아이들이 진정으로 평화로 가득 찬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시간을 마음껏 향유하며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려보자. 저절로 기쁨에 찬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이 같은 행복이야 말로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이 아닐까.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사람이 하는 모든 노력의 목적은 행복을 얻는 것이다. 행복을 위해 예술이 창작되고, 학문은 육성되며, 법이 만들어지고, 사회가 형성된다”고 했다. 부와 명예와 존경을 비롯한 다른 모든 목표들은 모두 행복을 위한 것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모두 행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결국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라며, “어떻게 행복을 얻고, 유지하며, 잃은 행복을 회복하는가 하는 문제야말로 모든 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는 행동의 내밀한 원동력”이라고 했듯이 말이다. 행복은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은 모두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고려돼야 한다. 행복! 그것은 주관적 판단인가, 객관적 기준이 있는가. 오리무중 속의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