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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what may

등록일 2016-04-27 02:01 게재일 2016-04-2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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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가수 박정현과 뮤지컬 배우 홍광호가 함께 부른 `Come what may` 영상을 보는 일로 요즘 하루를 열고 닫는다. 영화 `물랑 루즈`에서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부른 것보다 훨씬 낫다. 박정현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공주를 연상케 한다면 홍광호는 왕자까지는 아니고 믿음직한 심복 또는 가난해도 꿈 크고 정직해 공주의 마음을 얻는 나무꾼 정도로 보인다.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며, 홍광호의 중저음으로 노래가 시작된다. 그걸 이어받은 박정현이 청아한 음색과 파워풀한 성량을 발휘할 때, 나는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둘이 한 목소리를 이뤄 때론 밀고 때론 붙잡으며, 하나가 잠시 물러났다가 다른 하나와 함께 날아오르며 바다에서 하늘까지, 달에서 태양까지, 여름에서 겨울까지를 오르내린다. 그걸 보고 들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노래의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나무꾼이 손을 내민다. 공주가 그 손을 받아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꽉 잡은 채로 모든 격정을 다 쏟아낸다. 5분짜리 노래가 한 연인의 평생처럼 느껴진다. 마주 본 두 사람이 “I will love you, until my dying day”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면서 노래는 끝난다. 한 편의 웅장한 뮤지컬을 본 것 같은 감동이 나를 감싼다. 이럴 땐 우는 수밖에 없다. 노래를 마친 두 사람은 상기된 얼굴로 포옹하고 무대를 내려온다. 무대 위에서 영원을 약속하던 연인이,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듯 다시 선후배이자 동료로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관객들도 퇴장했는데 나만 아직도 나무꾼인 채로 박정현 공주를 애틋하게 그린다. 죽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하리다!

가수나 연기자들은 참 대단하다. 연기와 현실을 분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뜨거운 감정을 주고받다보면 실제 사랑에 빠지게 될지 모른다. 박정현과 홍광호의 무대를 보면서, 저 둘이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면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저토록 확신에 찬 두 눈에 세상 모든 별빛을 담아 서로를 바라보는데.

대학 때 직접 쓴 희곡을 가지고 극을 연출한 적이 있다. 배우들은 후배들이었다.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후배가 연기를 잘했다. 고등학생이었는데 혼자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보석처럼 빛났다. 그 아이가 예쁘기도 했지만, 배역이 좋았다. 원래 지닌 매력이 배역과 어우러져 극대화됐다. 내 마음이 이상했다. 그 후배를 계속 극 중 역할로 생각하며 상사병을 앓았다. 영화 `홀랜드 오퍼스`에서 고등학교 음악 교사인 홀랜드가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 로웨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로웨나가 조지 거슈윈 곡 `I got rhythm`을 부르는 모습은 정말 사랑스럽다. 그 아이도 로웨나처럼 눈부셨다.

상대 연기자와 금방 사랑에 빠져버릴 나 같은 사람은 절대 배우도 가수도 되지 못한다. 극이 끝난 후에도 혼자 환상 속에 남아 고통 받을 게 자명하다. 연예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대와 무대 뒤, 극 중 세계와 현실을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배역의 자아에 함몰되어선 안 된다. 그런데 가수도 배우도 아니면서 무대와 무대 뒤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판이 깔렸을 때는 무릎도 꿇고 구걸도 하고 호떡도 먹고 “여러분 사랑합니다” 외쳐대더니 무대의 불이 꺼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꼰대`로 되돌아갔다. 수많은 약속들과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벌써 무시되거나 폐기되고 있다. 국민들을 드라마에 빠져 현실도 분간 못하는 바보로 보면 안 된다. 국민들은 누가 제일 뛰어난 연기자인지 두 눈 부릅뜨고 볼 것이다. 부디 무대에서 한 약속들을 무대 아래에서 다 지켜주길 바란다. Come what may(무슨 일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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