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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절(根絶)의 어려움에 대하여!

등록일 2016-04-08 02:01 게재일 2016-04-0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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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모든 것이 솟구치는 시절. 대지에 뿌리 내린 것이라면 하나같이 봉기(蜂起)하는 계절. 저 양양(揚揚)한 기세는 그야말로 욱일승천(旭日昇天)이다. 아침저녁으로 표정을 바꾸는 초목의 약동은 봄의 환희를 웅변한다.

예전에는 꽃이 피어나는 순서가 있었다. 동백이 피어나고 영춘화가 세상과 만나면 매화와 산수유가 뒤를 잇는다. 그 다음 살구와 명자꽃이 피고 개나리와 목련이 얼굴을 내민다. 그 무렵이 지나면 벚꽃이 세상을 환하게 하고, 진달래와 싸리 등속이 단아(端雅)하고 처연(悽然)하게 고개를 든다. 키 작은 민들레와 냉이, 제비꽃도 뒤질세라 여린 몸을 열어 하늘을 우러른다. 그러다가 수수꽃다리가 번지면서 봄은 절정으로 치닫는 것이다.

그러던 풍경이 언제부턴가 일순 (一瞬) 뒤바뀌어 백화쟁명이 되고 말았다. 매화와 산수유가 피고 질 무렵 만산홍화가 줄지어 개화한다. 꽃들에게도 질서가 사라져버린 불고염치의 시대가 도래(到來)한 것이다. 개화를 향한 무한경쟁 시대에 이 나라 초목도 발 벗고 나선 셈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명리와 출세만 바라보고 질주하는 인간군상의 집단군무가 세상을 혼탁하게 한 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겠는가?!

아마 그들의 욕망도 시초(始初)에는 작고 여린 것이었을 터다. 자그마한 소망이 하나 둘씩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제어 (制御) 불가능한 규모로 확대재생산 되지 않았을까. 노자(子)는 이것을 정갈한 비유로 설명한다. “9층 누대(臺)도 한 삽의 흙에서 비롯되고, 아름드리 거목도 미소(微小)한 것에서 생겨나며,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의 시작이 미미(微微)하고 하잘것없는 것이었음을 웅변하는 명구(名句)다.

나의 봄도 노자의 가르침과 멀지 않다. 작년에 앞마당에 민들레가 일시에 피어나 민들레 정원이 되었다. 노란색 민들레꽃은 보기에도 그만이어서 그들의 번창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민들레의 생명력이 얼마나 질긴지 확인하는 것은 커다란 수고를 동반한다. 지천에 널린 민들레 수효를 줄이고자 몇날며칠 고생해도 그들의 집착(執着)은 상상을 넘는 차원에 있었다. 거기서 알게 된 생명의 강인(强靭)함은 그야말로 충격(衝擊)과 공포였다.

겉에 드러난 민들레의 잎과 줄기 혹은 상당 부분의 뿌리를 제거해도 민들레는 죽지 않는다. 약간의 뿌리만 대지에 내리고 있으면 언제 잘려나갔느냐 시위(示威)라도 하듯 민들레는 다시 우뚝 피어나는 것이었다. 지상의 이파리와 꽃대보다 훨씬 강력하고 긴 뿌리에 의지하는 민들레의 생명력이라니.

거기서 `근절`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자명한 이치다. “뿌리를 잘라낸다”는 것을 뜻하는 근절. 원하지 않는 풀, 불원초(不願草)를 없애고자 한다면 근절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항용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욕망과 오류는 민들레처럼 작은 홀씨 하나에서 비롯한다. 그것이 적절한 생장조건과 만나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번져나가는 것이다.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먼 정치가들의 탐욕도 그런 양상으로 번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근절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데 있다. 불원초는 적절한 선에서 이파리와 꽃 심지어는 일부의 뿌리까지 쉽게 내준다. 퇴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후의 생명 저지선(沮止線)은 양보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도만 남기고 그저 물러서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마치 우리의 음습(陰濕)한 욕망이 근절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올봄에도 나는 며칠을 민들레와 이름 모르는 불원초 근절에 돌입(突入)했다. 그들과 씨름하면서 나의 저급한 욕망과 세상의 근절되지 않는 허다한 욕망과 그것의 충돌을 생각한다. 언젠가 세월이 더 흐르면 불원초를 근절하겠다는 나의 욕망마저 근절될지 모르겠다. 아직은 호미와 삽을 들고 설치는 꼴을 보이고 있으니, 철이 덜 든 것인지도 모른다. 창밖에는 직박구리들이 화사한 벚꽃을 탐식(貪食)하고 있다. 봄이다. 흐드러진 봄날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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