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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은 간다

등록일 2016-04-06 02:01 게재일 2016-04-0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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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지난주 갑작스런 고온현상으로 5월 하순마냥 더웠다. 벚꽃이 화들짝 폈다. 저들도 놀란 모양이다. 요즘은 봄꽃 피는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매화와 산수유가 아직 꽃망울 매달고 있는데 진달래, 개나리가 피어난다. 벚꽃과 목련도 하늘 아래 환하다. 어딜 가도 다 울긋불긋하다. 자연의 순리가 깨지는 건 안타깝지만, 꽃의 독주가 아닌 오케스트라를 듣는 기쁨이 크다. 웅장하고 환희로운 색채의 볼륨을 한껏 높여본다.

봄꽃 피는 무렵이면 몇 개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학부 시절, 시비(詩碑) 탐방을 하고 인증 사진을 찍어 제출하는 과제를 받았다. 햇살 좋은 봄날에 집 밖으로 나가 꽃도 보고 시도 읽으며 세상 아름다운 줄 좀 알라는 교수님의 배려였다. 연세대 윤동주 시비, 도봉구의 김수영 시비, 남산의 김소월 시비 등이 있었지만 안 갔다. 그땐 꽃이 예쁜 줄도 몰랐고, 세상의 풍요는 더더욱 나와 상관없었다. 과제는 내야했기에 인터넷에서 찾은 소월의 `진달래꽃` 시비 사진에다가 내 사진을 합성해 제출했다. 칼라 인쇄를 하면 티가 날까봐 흑백으로 출력했다. 모교에서 시간 강사를 하는 지금, 학생들에게 같은 과제를 냈다가 내 안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는 철회했다.

학과 내에 시를 쓰는 소그룹이 따로 있었는데, 지도교수님을 따라 봄 북한산에 갔다. 청수장에서부터 대동문, 칼바위능선을 지나 백운대까지 올랐다. 산을 오르며 본 진달래능선이 산불처럼 장관이었다. 산에서 내려와 구파발 홍탁집에서 저녁까지 술을 마셨다. 내가 좋아하던 여학생이 먼저 자리를 떴다. 바래다주며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은데, 교수님이 요지부동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져 “교수님, 많이 드셨는데 이제 일어나시죠” 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 “이놈이 나한테 투사를 하네” 하셨다. 시는 해석과 투사의 예술이라고, 거기서도 가르치셨다. 그녀는 이미 집으로 돌아갔고, 막걸리 되게 취해 혼자 걸어오는 밤, 내 마음 열병을 벚꽃에다 떠다 넘겼다. 다 봄 때문이라고, 이 뜨거운 불덩이는 다 꽃 같은 그 아이 때문이라고!

두 해 뒤, 사이먼 앤 가펑클 `April come she will`처럼 사월을 온통 꽃숭어리로 뒤덮으며 한 여자가 왔다. 그녀는 꼭 목련꽃 같았는데, 저 혼자 아름다우면서 또 두루 선하고, 누구에게도 지나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 말없이 큰 눈만 빛낼 때, 그 깜박이는 작고 둥근 우주에 빠져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외사랑은 피어서는 더없이 순결한데, 지고나면 진창이다. 꼭 목련꽃처럼 말이다. 온통 멍들고 짓이긴 상처와 고름 위를 질척거리며 한 시절을 보냈다. 그 여학생도, 목련꽃 같던 그녀도 지금은 모두 애엄마가 되었다.

꽃이 아름다운 줄 알게 된 후로는 섬진강변 홍매화와 김해 건설공고 와룡매화도 보러 가고, 쌍계사 벚꽃길도 거닐곤 한다. 집에서 가까운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의 수양벚꽃은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꽃송이마다 거기 아직 색도 열기도 다 가시지 않은 내 봄날의 추억들이 물들어 있다. 매년 피는 봄꽃이지만 2016년의 봄꽃은 지금 뿐이다. 봄날도 가지만 봄꽃도 간다. 살면서 놓친 것들이 많지만 특히 속상한 건 2003년의 벚꽃과 2006년의 진달래와 2011년의 매화를 보지 못한 일이다. 나를 위해 차려놓은 봄꽃 뷔페에 가 앉지 못했다. 봄날에 꽃구경 한번 가지 않는 것은 취소 연락도 없이 예약 장소에 안 나타나는`노 쇼(no show)`나 마찬가지다. 겨울을 뚫고 힘들게 꽃대궐 차린 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학생들에게 주지 못한 과제를 여러분께 드리고자 한다. 시비가 세워진 곳은 대개 공원이거나 자연과 가깝다. 꽃구경 할 겸 시비 탐방 한번 다녀오시라. 대구에는 이상화 시비가 있고, 도동에는 아예 시비 공원이 있다. 포항에도 이육사와 박인로의 시비가 있다. 영화 `동주`로 시에 대한 관심이 높은 요즘이야말로 연인끼리, 가족끼리 가볼 만하다. 그런데 부디 남자들끼리는 가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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