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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이병철

등록일 2016-03-09 02:01 게재일 2016-03-0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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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나는 내 이름을 싫어한다.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이 입다 벗은 옷을 주워 입는 듯한 찜찜한 기분이 들고, 이름의 주인이 따로 있는 것만 같다. 내 고유한 생이 누군가의 아류처럼 여겨지는 것만 같아 불쾌하다.

새 학기 출석을 부를 때면 선생님들은 꼭 “회장님이 여기 계시네? 너희 집 돈 많으냐?”라고 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군대에 가서도, 심지어 사회에 나가서도 그 질문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하도 자주 물어보니까 “이름만 부자고 사람은 거지”라고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인 적도 있다.

회장님과 나는 이름의 한자도 똑같다. 아버지께서 작명소에 가 지어왔는데, 돈 많이 버는 이름이라면서 역술인이 추천한 것이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나도 미아리에 돗자리 깔겠다. 정씨면 정주영, 김씨면 김우중, 신씨면 신격호라고 이름 짓는 일이 뭐 어려운가.

한산 이씨 문열공파로서 목은 이색의 후손인 나는 항렬로 따지자면 `복`자 돌림을 써야 한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조금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복` 대신 얻은 이름이 병철인데, 이것도 그다지 세련되지는 않다. 그저 다른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이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 때는 다들 유치해서 `병`이 들어가는 욕설 등으로 놀렸다. 중학생 때는 그 수준이 조금 향상됐다지만 “이 병은 철로 만들었습니다” 따위 졸렬한 삼행시를 듣고 있노라면 막말로 뚜껑이 열렸다. 고등학생 때는 `빙치리`, `뱅철이` 같은 언어유희의 표적이 되곤 했다. 왜 나는 혁이나 빈, 훈, 우성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없는가 한탄하는 날이 많았다. 이건 농담이 아니고 진짜 진지하게, 나는 “이병 이병철” 하기 싫어서 장교로 군대에 간 사람이다.

누가 문득 내 이름을 부를 때, 혹은 약 봉투나 우편물에 적힌 내 이름이 보일 때 나는 순간적으로 소스라친다. 기표로서도 이상하고 음가도 괴상한데 `회장님`이라는 기의 때문에 더더욱 내 이름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등단만 하면 필명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몇 개의 이름을 지어놓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나는 `이병철 시인`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필명을 써서 복잡하고 귀찮은 일들 자주 겪을 바에야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필명의 물망에 올랐던 이름들은 차마 열거할 수 없다. 정말 손발이 다 오그라든다.

그럼에도 손자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음성이나 눈멀고 귀먹은 할머니의 어눌한 발음을 생각하면 내 이름은 우산이며 난로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따뜻한 입술로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꼭 `병철`이 아니었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이름이 어떻게 본질을 규정하고 구속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겐 `늑대와 춤을`이나 `주먹 쥐고 일어서` 같은 인디언 이름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이젠 다 틀렸다. 개명도 할 수 없고 필명을 쓰기에도 늦었다. 이름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대적하는 일이 요원해진 가운데, 단 하나의 가능성만 유효하다. 내 이름이 가진 상투적 기의를 스스로 거세시키는 방법이다. `회장님`과 무관하게 철저히 자본과 경제, 돈으로부터 멀어져서 사는 것이다. 이 방법론은 자발적 가난을 의미하거나 궁핍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되진 않을 것이다. 먹고 살만큼은 벌어도 물신의 노예는 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게 내 이름에 대한 복수이자 예의다.

이 글이 게재될 때 나는 노르웨이 베르겐에 있을 것이다. 게스트하우스 프런트에서 벽안의 외국인이 `리쁑촐`하는 소리나 가만히 들으면서, 노르웨이식으로 이름을 짓는다면 어떤 게 좋을까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뭉크보다는 `글람벡 뵈`나 `스톨텐베르그` 같은 고난도 발음이 좋겠다. 그런 이름이라면 친구들도 어떻게 놀려먹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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