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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가 되지 못한 끄리의 고백

등록일 2016-02-24 02:01 게재일 2016-02-2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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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나를 잘 아는 이들은 절대 동의할 수 없겠지만, 평소 사람들로부터 점잖고 차분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다. 장교로 군 복무를 하고, 대학원에서 지도교수들을 모시면서 어떤 침착한 태도 같은 것들이 습관처럼 몸에 밴 것 같다.

하지만 내 차분함은 고작 한 꺼풀이 전부다. 벗겨지는 순간 흉한 알몸이 그대로 드러난다. 내가 지닌 매너는 사실 습관이 아니라 의식적인 것이다. 타인에 의해 간섭 받거나 피해 입는 것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나도 타인의 반경 안으로 잘 들어가지 않는 것뿐이다. 내가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도 부당하게 피해를 입을 때, 타인의 고의적 잘못으로 내가 억울함을 당하게 될 때 나는 폭주한다. 길길이 날뛰는 야수가 된다.

하루는 지인들과 청계천에 바람을 쐬러 갔는데, 대학 운동부로 보이는 사내들이 술병을 들고 웃통을 벗은 채 소란을 피우는 것이었다. 피해가려는데 동선이 겹쳤다. 인공폭포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물장난을 하는데 그 물이 나와 우리 일행에게 튀었다. 같이 온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냥 지나쳤다가 이미 피가 거꾸로 솟아 나를 제어할 수 없었다. 만류를 뿌리치고 그들에게 가 험한 말을 했다. 싸우자는 거였다. 몸싸움이 일었다. 그러다 그쪽이 사과하면서 일단락되었는데, 하마터면 일대 다수로 맞아죽을 뻔했다. 그 순간에 치미는 부아를 해결하지 않으면 몸속에 불이 나 견딜 수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것, 이성의 웃통을 함부로 벗지 않는 것이 신사의 품격이라면, 나는 자격미달이다. 택시 승차나 주차 문제, 내 소중한 생활권이 침해될 때, 친절과 예의가 무례함으로 돌아올 때, 이유 없는 고압적 태도와 마주할 때 나는 성격이 급해지고 다혈질로 변한다. 그걸 겉치레로 감추느라 피곤하다.

타인과 전혀 무관한 상황에서도 울컥할 때가 있다. 지난주 내내 몹쓸 결막염으로 고생했다. 눈두덩이 부어오르고, 토끼눈이 되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고, 돌이 들어간 것처럼 아팠다. 밖에 돌아다니기는커녕 책상 앞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일상이 멈추면서 산더미 같은 일들을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열불이 뻗쳤다.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까칠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막 걷어찼다.

고작 결막염 하나로도 그 난리인데, 누명을 써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거나 강제로 징집이라도 되면 미쳐 날뛰다 제 분에 못 이겨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강에 사는 물고기 중에 끄리라는 녀석이 있는데, 성격이 포악하고 급해 깡패라고 불린다. 낚시로 잡아 살림통에 넣어 놓으면 마구 뛰어오르고 사방팔방 부딪치다가 5분 만에 죽어버린다. 금방 죽어서 관상용도 될 수 없고, 맛이 없어 식용도 안 된다. 그래서 잡고기 취급을 받는다. 내가 꼭 그 끄리 같다.

누구라고 제 안에 불덩이 같은 분노가 없겠는가. 시대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뿌리 뽑힌 사람들을 알고 있다. 한 국가와 민족이 겪은 것보다 더 처절한 개인의 아픔을 평생 지고 사는 분들 말이다. 나로서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여덟 시간도 아니고 팔십 평생이다. 끄리 같은 내 소갈딱지였다면 알코올 중독의 불한당이 되어 닥치는 대로 걷어차고 살았을 것이다. 그분들이라고 그렇게 할 수 없어 안 한 게 아니다.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으며 비인간적인 이들을 상대로 신사적인 싸움을 묵묵히 해온 것이다. 국가의 품격을 높인 건 정치가나 기업가가 아니라 바로 그분들이다.

영화 `귀향`이 개봉되었다. 상영관 수를 늘리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는 중이다. 상업시설인 극장은 흥행이 보장되지 않는 영화를 상영할 의무가 없으므로 나는 상영관 확보 운동에 동참할 생각이 없다. 다만 마음으로 응원하고, 조그마한 일에만 분노하는 삶의 태도를 바꿔보고자 한다. 불같은 에너지를 좀 더 공의로운 곳에 쓸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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