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이 저물어 갈 무렵 미술중점학교 학생들을 인솔해 대전시립미술관에 갔다. 특별 기획전시인 전 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하이퍼리얼리즘 작가 15인의 `극사실주의 특별전:숨쉬다`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교육부지정 미술중점학교 운영담당자로서 학생 인솔이 임무였으나, 벅찬 현실 속에서도 평생 붓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필자에게 아직도 순수한 예술가의 꿈이 가슴 깊이 자리하고 있으니 세계적인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설렘 또한 적지 않았음이 사실이다.
`21C 하이퍼리얼리즘:숨쉬다`는 서양현대미술의 핵심을 보여주는 하이퍼리얼리즘 회화와 조각 등 극사실주의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관객들의 호기심과 경이로움을 유발하고 예술표현의 한계를 확장하는 것이 기획의도였다. 사진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회화의 매체성, 더욱 정교해진 표현과 더불어 신소재를 사용한 조각 작품은 20C 하이퍼리얼리즘과는 다른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20C의 하이퍼리얼리즘이 외형을 복제하는 것이었다면 21C의 그것은 외형 뿐 아니라 내면의 영혼까지 고스란히 스캔해내는 느낌이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작품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관람 진행을 도와주는 도슨트의 설명이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였고 걸음을 옮기기가 두려울 만큼 나 자신의 내면이 해체되는 것 같은 충격, 지금 현재의 나 뿐 아니라 몇 생을 거슬러 오르내리며 나에게 던져주는 강렬한 예감들에 전율하였던 것이다. 전시작품과 관객이 함께 어우러져 마치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처럼 느껴졌다.
한 작품의 감동이 가시기도 전에 이어지는 다음 작품이 주는 놀라움은 좋은 작품을 만난 환희보다 오히려 스스로를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평생 예술가의 꿈을 내려놓지 못했으나 정신없는 일상에 허덕이다 전시 일정에 맞춰 바쁘게 그려내는 내 그림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한계, 이미 탈장르의 시대에 입체가 가지는 힘과 평면의 한계, 첨단 재료의 차용에 대한 연구, 대상에 대한 집중력, 표현에 대한 기술적인 연마 등 숱한 상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시에서 나를 가장 사로잡은 작품은 샘 징크스의 `피에타`였다.
`피에타`는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빠진 성모를 표현한 미켈란젤로 조각상의 오마주다. 샘 징크스의 `피에타`는 젊은 자신이 늙어서 죽은 자신을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살아가면서 죽음을 응시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그 작품이 내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거기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양복 입은 장년의 남자가 백발의 늙은 남자 시신을 흰 천에 감아 안고 있는 모습….
실리콘, 섬유유리, 수지, 탄산칼슘 등의 첨단 재료로 머리카락 한 올, 창백한 피부 속의 실핏줄 흐름까지도 표현해 낸 집중력은 경이로움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으며 누구나 삶의 과정에서 만나게 될 생로병사의 모습이고 그것이 삶의 보편성이라는 허무함과 쓸쓸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흔히 예술을 순수라 하여 현실과 분리하곤 하지만 진정한 예술은 현실의 삶 속에 있는 법이다. 물질의 경박함을 예술행위들이 완충하여 상호 보완함으로써 세상을 지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녹여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이 시대 앞선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예술가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 자신을 돌아보니 내면의 깊은 성찰 없이는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됐다.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양함을 혼돈으로 여기지 말고 다양성을 인정할 것, 알 수 없는 것에 불안해하지 않고 내가 배운 것, 내가 해온 것, 그리고 직접 경험하여 잘 알고 있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하여 자신만의 색깔을 분명히 한다면 살아있는 내가 미래의 죽은 나를 안고 그렇게 허망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새 어둠을 품고 다시 돌아오는 버스, 떠날 때의 설렘은 간 데 없고 어두운 차창엔 죽은 남자의 시신을 안은 내 모습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