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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트기류의 나비효과

등록일 2016-02-03 02:01 게재일 2016-02-0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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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마침내 한파가 물러갔다. 기록적인 추위였다. 특히 제주도에는 무려 90년만의 강추위와 32년만의 폭설이 찾아왔다. `찾아왔다`고 하면 너무 친절한 느낌이고, `급습했다`가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렇다. 추위와 폭설은 제주도를 급습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시설과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제주공항과 여행객들이 무방비로 당했다. 이 과정에서 뜻밖의 일망타진(?)이 이뤄졌는데, 요즘 말로 `웃픈`(웃기고도 슬픈) 사례들이 사람들 입에 연일 오르내리고 있다.

월차 내고 여행 갔다가 폭설에 발이 묶여 나란히 출근 못 한 남녀 사원들의 비밀 사내연애가 곳곳에서 들통 났다고 한다. 들통 난 비밀연애야 시원하게 인정하고 그간의 사정을 고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불륜과 `바람`이다. 출장 간다고 했던 남편이 뉴스 화면에 낯선 여인과 함께 등장했다. 등산모임에 다녀온다던 아내가 제주공항에서 젊은 남자와 같이 있는 걸 지인이 목격했다. SNS에 퍼진 실시간 제주공항 상황 사진 속에 내 남자친구가 왜 민경이랑 같이 있는지 모르겠다. 기도원에 부흥회 다녀온다던 여자친구는 하늘로 승천했는지 닷새 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 등 온갖 사연들이 알려지면서 제주도는 `불륜 커플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판이다.

여행은 달콤했을 것이다. 애월과 협재 겨울바다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라산과 성산일출봉은 장관이다. 테디베어 박물관이니 러브랜드니 아쿠아리움 같은 필수 데이트 코스도 빼놓을 수 없다. 제철 방어회와 흑도야지를 먹으며 “우리 이래도 괜찮을까?”라고 묻는 말에 “하늘이 두 쪽 나지 않는 한 절대 들킬 일 없다”고 대답했으리라. 그런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하늘이 두 쪽 난 듯 폭설이 쏟아진 것이다.

북경의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면 뉴욕에 폭우가 내린다는 나비효과가 떠오른다. 이번 한파와 폭설은 북반구 중고위도의 제트기류가 지구온난화로 약해지면서 북극의 찬바람을 밀어내지 못 한 것이 원인이다. 제트기류의 약화가 한반도를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 한파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지만, 지구가 따뜻해지면 한국 어느 가정에 매서운 찬바람이 몰아친다는 건 새로운 이론이다. 학계의 주목까지는 차마 요청하지 못 하겠다.

우주의 예측불허성, 이것은 카오스 이론(혼돈 이론)의 핵심 개념이다. 이쪽의 나비 날갯짓이 바다 건너 먼 나라에 비를 내린다는 걸 그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뉴스에서만 들었던 지구온난화가 이혼소송과 가정 파괴, 자녀들의 불행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똑같은 힘으로 여러 번 종이를 구겨도 종이에 새겨지는 구김살의 문양은 제각각이다. 돌연한 사고로 삶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이 세계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과 불확실성, 혼돈으로 이뤄진 곳이다. 자꾸 확실하다고 말하는 사람, 무엇이든 금방 단정 짓는 사람, 쉽게 장담하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어리석은 자다.

바람피우다 제트기류에 얻어맞은 이들은 전혀 측은하지 않다. 입사 자축 여행을 갔다가 첫 출근을 하지 못 한 신입사원의 사연이나 생애 첫 가족 여행이 가족 노숙이 되어버린 이웃의 이야기는 참으로 안타깝다. 며칠 전만 해도 여행의 즐거움을 누리며 제주 찬가를 부르더니 이제는 다시 안 간다며 제주를 저주하는 친구에게 변변한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 했다. 어쩌겠나. 세상이 그렇고 인생이 그러한 것을. 단 몇 분 뒤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이달 말에 나는 제트기류의 고향인 저 문제적 북반구, 노르웨이로 여행을 간다. 텐트와 침낭 메고 가 캠핑을 할 거다. 정말로 혼자 가기 때문에 자연의 정의구현에 까발려질 죄나 비밀은 없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예정된 계획들이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변경되는 사태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인 탓에 돈으로 어떻게 해볼 요령이 없어서다. 차라리 북극곰을 만나거나 바이킹족 여인과의 로맨스는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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