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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솔선수범

등록일 2016-01-27 02:01 게재일 2016-01-2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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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공병 장교로 근무하던 군대 때 일이다. 이제 막 자대에 부임한 초급 장교였던 내게 주어진 첫 임무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단장 공관 복원` 공사였다. 소대원들과 함께 폐가나 다름없던 옛 공관을 맨손으로 부수고 뜯어내고 파내며 기초 공사를 했다. 굴삭기를 비롯한 공병대 중장비가 주요 공사를 하는 동안 나와 소대원들은 나무에 올라 벌집을 제거하고, 인근 민가의 개집을 철거하고, 돌을 뽑아낸 진입로에 잔디를 심었다.

준공식 날, 하늘이 뚫린 듯 폭우가 쏟아졌다. 군사령관과 사단장 등 별들의 향연에다 군수, 도의원, 기자들까지 모인 가운데 기념식수용 소나무를 운반하는 수레가 진입로를 오르지 못해 행사가 지연됐다. 이등병처럼 얼어 있던 대대장이 갑자기 우산을 내던지고 달려가 소처럼 수레를 밀기 시작했다. 행사 미관을 해친다 하여 안 보이는 구석으로 `치워져` 있던 나와 소대원들도 달려 나가 수레를 밀었다. 소나무는 결국 크레인에 의해 운반되었다. 대대장은 사단장에게 `불굴의 군인 정신`을 칭찬 받았지만, 우리들은 다시 치워졌다. 준공식이 끝난 후 속옷까지 흠뻑 젖은 채로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먹으며 `잔반 처리`를 할 때, 소대원들에게 미안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군대에서는 상급자의 솔선수범이 우스운 촌극을 낳는 경우가 종종 있다. 초심을 기억하고자 `처음○○` 소주만 마신다는 참모장에 의해 모든 부대의 회식 자리는 물론 20년 째 두꺼비만 애호한 주임원사까지 술을 바꾸고, 연대장이 자전거 출퇴근을 하자 모든 간부들이 월급을 털고 신문구독을 신청해 자전거를 장만한 일도 있다. 얼어붙은 저수지를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어 지역민에게 개방한 날, 먼저 스케이트화를 신고 엉거주춤 빙판을 달리다 자빠진 사단장 뒤로 무궁화와 다이아 수십 개가 일제히 엉덩방아를 찧던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다.

어디 군대뿐이겠는가. 퇴근 안 하는 상사 때문에 할 일 없이 자리 지키고 앉은 직원들의 한숨소리는 우리 고유의 기업문화가 되었다. 회사를 사랑해서 일요일에도 출근한다는 전무님 덕분에 사원들은 `월화수목금금금` 마법의 달력을 책상에 올려놓는다. 사장님들은 제발 새로운 취미활동을 자제해줬으면 좋겠다. 등산, 골프, 조기축구, 낚시, 스쿠버다이빙, 심지어 주말농장 가꾸기까지. 어떤 가수는 `취미는 사랑`이라고 노래했지만, 직장인들에게 `취미는 사장`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킬지 모르거나 너무 잘 아는 우두머리들이 불편한 솔선수범을 보이곤 한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함이든 알고 이용하는 속셈이든 `알아서 기는` 아랫사람의 눈치와 만날 때 위와 같은 촌극들이 발생한다. 감화와 감동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불안감과 약점을 건드려 마지못해 나서게 하는 것은 솔선수범보다는 협박에 가깝다.

얼마 전 대통령이 경제단체와 기업인 주도의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영하의 추위를 무릅쓰고 거리에 나가 서명부에 직접 이름을 적은 것이다. 국민의 참여를 독려한다는 나름의 솔선수범인데, 국민운동이 되는 대신 청와대에 `찍힐 것`을 두려워한 정재계의 `진실한 사람 인증`으로 변질되는 모양새다. 회장님 및 기관장님들이 서명하는데 하부조직과 그 직원들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머잖아 서명운동 행사장에 45인승 관광버스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른다.

군자지덕풍(君子之德風)이라고 했는데, 15년만의 최강 한파다. 겨울바람에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었다. 쪽방촌 독거노인들은 난방비 걱정에 입김 나오는 냉골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있고, 한파 여파로 국가의 혈액 재고가 바닥났다고 한다. 서명운동보다 독거노인을 위한 연탄 배달이나 헌혈에 솔선수범한다면 국민들 마음에 따뜻한 봄바람이 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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