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번 산 고양이`(사노 요코·비룡소)는 매우 철학적인 그림책입니다. 매우 시적인 그림책입니다. 노자의 함축과 역설을 떠올리게도 하고 월명사의 제망매가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 연상됐다가 나탈리 배비트의 `트리갭의 샘물`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100만 번 산 고양이`와 `나`(독자)의 삶이 내외면의 여러 곳에서 곧잘 겹치거나 투영된다는 점입니다.
`그림책 & 문학읽기`에서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문학은 모든 억압(이 억압이란 밖에서 들어오는 억압, 자기 내부에서 솟아나는 억압을 모두 말합니다)에 저항하고 이 세상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보는 행위입니다. 질서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억압입니다. 그러므로 문학은 근본적으로 저항이며 새롭게, 달리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학의 본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문학은 `100만 번 산 고양이`에서처럼 백만 번 되풀이되어 온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트리갭의 샘물`에 나오는 가족처럼 변화 없이 영원토록 한 자리에 멈추어져 있는 삶, 쳇바퀴처럼 영원히 사는 무의미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 탈출하는 것,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길가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 나뒹구는 페트병과 무엇이 다를까요?
`백만 년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것이죠. 정말 멋진 얼룩 고양이였습니다.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로 시작되는 `100만 번 산 고양이`에서 `백만 번`은 시간이나 횟수를 뜻하는 게 아니라 무료하고 무의미한 삶을 가리킵니다. 백만 번이든 천만 번이든 타의로 죽었다 살아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백만 명이든 천만 명이든 누군가의 고양이로 살다가 죽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작가 사노 요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그림책은 이렇게 답합니다. `한때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었습니다. 도둑고양이였던 것이죠. 고양이는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가 됐습니다. 고양이는 자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중략…)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할 정도였습니다(…중략…)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100만 번 산 고양이` 후반부에 고양이가 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신과 의미 있는 삶을 함께했던 하얀 고양이가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이지요.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울었습니다.`라는 장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쏟기도 합니다. 고양이처럼 뜨겁게 울어봤던 기억이 떠올라서일 겁니다. 고양이는 처음이자 마지막 울음을 그친 후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어떤 그림책은 하릴없이 사람을 울리기도 합니다. 여섯 살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삶과 죽음, 문학과 사랑에 대해 다시 하릴없이 생각해보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