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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어묵탕

등록일 2016-01-20 02:01 게재일 2016-01-2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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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사람들은 보통 자신과 욕망하는 바가 같은 이를 미워한다. 내가 특정한 누군가를 계속 험담한다면, 그건 그 험담의 대상이 내가 가지려는 것을 똑같이 욕망하거나 이미 가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오르고 싶은 자리, 얻고자 하는 상급을 향한 일차선 도로를 남과 함께 주행하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도 없다.

고등학교 때, 한 남학생을 똑같이 연모하던 여학생 둘이 서로에 대한 비난과 근거 없는 악의적 소문내기로 척을 졌던 일이 떠오른다.

그 남학생이 나라는 것을 굳이 밝히는 까닭은, 두 여학생의 우정에 금이 가게 한 것을 이제나마 사과하기 위함이다. 나는 둘 중 누구의 손도 잡아주지 않음으로써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분노와 미움을 나에게로 돌리며 둘이 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일은 이렇게도 흔하다.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해야한다고 목청 높인 것은 그 자신이 시인이었기 때문 아닐까. 어느 술자리에서 한 젊은 시인이 자신보다 어린, 요즘 소위 `잘 나가는` 시인의 시집을 어묵탕 냄비에 넣고 끓여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내가 욕망하지만 소유하지는 못하는 것을 타인이 갖고 있을 때, 열등감은 `시집 어묵탕`과 같이 유치하고 졸렬한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자기 안에 어묵탕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와 증오를 제어하지 못 하는 것이다.

나는 쏘가리 낚시를 즐긴다. `즐긴다`는 것도 강가에 나 홀로 있을 때만 가능한 얘기다. 내가 자주 가는 전남 곡성 섬진강 일대는 포인트로 진입하는 포장도로가 하나뿐인데, 남원 톨게이트를 지날 때부터 같은 방향으로 가는 차들이 영 거슬린다. 이 차에도 낚시꾼, 저 차에도 낚시꾼이 타고 있을 것만 같다. 우회전과 좌회전, 시골 구멍가게를 지나 굴다리를 통과할 때까지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지프차를 보며 불유쾌한 예감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마침내 정체를 드러낸 낚시꾼과 같은 장소에 차를 세우고 강가로 걸어가는 기분은 정말 찝찝하다. 그 역시 내가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낚시해도 한 마리 잡을까말까 한 쏘가리인데, 그 저조한 확률을 남과 공유해야 한다는 데서 부아가 치민다. 그러다 옆의 사람이 한 마리 잡기라도 하면 눈이 뒤집힌다. 옆에서 들려오는 환호작약과 물 첨벙거리는 소리는 마치 나를 조롱하는 듯하다. 그런데 대뜸 그가 나에게 저쪽으로 채비를 던져보라며 힌트를 준다. 그가 가리킨 곳을 공략해서 나도 한 마리를 낚아낸다.

그와 나는 이제 적이 아니라 함께 낚시를 즐기는 `조우(釣友)`가 되었다. 급기야 근처 식당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상대방의 낚시를 추켜세우기까지 한다. 화산처럼 뜨거운 욕망도,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미움도 한순간에 봄볕처럼 유순해질 수 있다.

나와 욕망하는 바가 같다고 해서 타인을 미워하지 말자. 영광에도 차수가 있어서, 그가 나보다 먼저 도착해 거기서 기꺼이 손을 내밀어줄지 누가 아는가. `먼저`와 `나중`보다 그토록 욕망하던 산정에 오르는 것이 더 중요한 일 아닐까.

공천도 하나고 당선의 영광도 하나이긴 하지만, 상대에 대한 비방과 흑색선전, 탈당과 창당, 전략적 단일화와 경선 불복, 룰 변경 따위를 매번 반복하는 정치권의 `욕망 질주`는 국민을 지치게 만든다. 자리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과 신뢰를 욕망한다면, 배신인지 영합인지 같은 것들을 과감한 결단과 통합으로 포장해선 안 된다.

국민들 눈에는 정치판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인, 다 똑같은 모양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어묵탕처럼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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