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및 알코올 중독의 무능한 아비가 집문서나 땅문서, 자식이 손수 마련한 대학 등록금을 술값과 판돈으로 엿 바꿔먹듯 탕진하는 내러티브가 외교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이러한 불가역 협상은 보통 사기꾼의 달변에 속아 넘어가거나 내 사정이 도무지 궁하여 `눈물의 땡처리`를 해야만 할 때, 또는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천치일 때 이루어지곤 한다. 내게도 뼈저린 불가역 협상의 기억들이 있다.
유치원을 겸한 태권도장에 다니던 여섯 살, 서울대공원으로 간 가을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했다. 나무 위와 바위틈 등에 숨겨진 종이를 찾으면 거기 적힌 상품을 주는, 일종의 경품 행사였다. 잔디밭을 한참 헤매다 꽃덤불에서 종이를 발견했다. `학용품`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나는 학용품이 뭔지 몰랐다. 한 살 위 형에게 물어봤더니 그거 별로 좋은 거 아니라면서 자기랑 바꾸잔다. 그래서 바꿨다. 바꾼 종이에는 `비누곽`이라고 쓰여 있었고, 집에 와 엄마에게 비누곽 습득의 과정을 말한 나는 등짝을 얻어맞았다. 연필과 샤프, 지우개, 노트 등으로 구성된 학용품이 1등 상품임을 알았을 땐 이미 불가역 상태였다. 물정 모르는 천치가 사기꾼의 꾐에 넘어간 복합적 사례다.
사정이 궁하여 어리석은 거래를 한 적도 있다.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홀로 자취하며 대학원에 다닐 때, 한 일 년 버티다 생활비가 없어 막막했다. 책을 사 보기는커녕 전기와 가스마저 끊길 지경이었다. 책상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장교 임관기념 반지가 생각났다. 금값이 한창 오를 때였다. 며칠을 고민하다 금 거래소에 가서 팔아먹었다. 산값보다 두 배 넘게 받았다.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엔 별로 고민도 안 했다. 돌잔치 때 선물 받아 유년기부터 20여년을 쓴 내 은수저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은수저 각 한 벌을 내다 팔았다.
그렇게 해서 월세도 내고 라면도 사먹고 하면서 며칠 잘 지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가 밀려왔다. 잠깐의 어려움에 현혹되어 영혼을 내다 판 것 같은 자책감에 괴로웠다. 내가 헐값에 넘긴 것은 임관기념 반지가 아니라 군대에서 겪어내야 했던 폭염과 고된 훈련, 그걸 이겨낸 자부심이었다. 그 반지 하나를 얻으려고 바쳤던 육체와 정신의 아름다운 고통이었다. 은수저 한 벌이 아니라 숟가락에 국물보다 먼저 고이던 아침 햇살, 밥 한 술에 담긴 사랑과 유년의 추억, 할아버지에 대한 은빛 기억들을 나는 팔아먹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한테 사정이 궁했던 모양이다. 그걸 안 일본이 교활하게 꼼수를 부려 우리를 바보천치로 만들었다. 이 협상으로 일본과의 외교가 정상화되어 당장 얼마간 이득을 볼 순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 자리마다 모두 폐허가 되어 뼈아픈 후회를 삼킬 것”이다. 명분을 포기한 실리는 결코 이익이 아니다. 그렇잖아도 이 나라는 청년들에게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엿 바꿔먹게 하는 불가역 거래를 강권하는데, 마땅히 지켜야 할 것조차 쉽게 내다 팔아버리는 행태까지 보인 것이다.
그나저나 그때 내게 비누곽 쥐어준 그 녀석은 학용품으로 공부 열심히 했을까? 이리저리 잔머리 굴려 성공한 사람이 되었을까? 어림도 없지! 절대 그랬을 리 없다. 27년 묵은 뒤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