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빛의 계절이다. 도심 거리는 물론이고 웬만한 시골 마을도 12월 밤은 즐거움으로 환하다. 그 환함의 주체는 바로 성탄절. 이젠 특정 종교의 행사가 아닌 종교는 물론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설렘과 사랑과 감사의 날이 된 성탄절. 비록 성탄절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크리스마스.
영국의학저널에 실린 덴마크 연구 내용은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덴마크 연구진들은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사람들과 바함버그(bah humbug, 크리스마스가 싫다는 뜻으로 스크루지가 외친 말) 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뇌를 분석한 결과 전자에 속한 사람들의 뇌가 영적, 신체감각, 얼굴표정 등을 담당하고 있는 뇌 영역에서 후자에 속한 사람들보다 훨씬 활성화되어 있다고 밝혔다.
혹 여러분들은 크리스마스에 대해 어떤 추억이 있으신지. 슬프게도 필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렇다 할 추억이 없다.
지난 주 수업 중 한 학생이 필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몇 살 때까지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믿으셨어요?” 이 질문에 필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질문한 학생만 한참을 보았다. 정말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성인이 되었어도 크리스마스는 필자에겐 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필자야 말로 덴마크 연구진들이 말하는 바함버그 신드롬을 앓고 있는 전형적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글을 쓰다말고 거울을 보았다. 연구 결과처럼 크리스마스에 대해 글을 쓰고 있지만 거울 속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한 사람이 멀뚱하게 거울 밖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섬뜩할 만큼 무표정함에 놀라 얼른 시선을 거두었지만, 한 번 각인된 그 얼굴은 쉽게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필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필자의 머리는 그 얼굴을 분석하고 있었다. 행복 지수 0, 웃음 지수 0, 희망 지수 0. 모든 것이 0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암담한 우리 사회와 같았다. 우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보려고 캐럴을 크게 틀었지만,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는 필자에게 캐럴은 그냥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필자는 조금 전 거울 속의 무표정한 얼굴이 왠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필자가 가르쳤고, 또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의 표정이었다. 필자는 웃음기 없는 학생들의 표정을 보면서 늘 학생들만 탓 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필자 때문이라는 것을 어리석게도 이제야 알았다.
거울 뉴런 효과라는 것이 있다. 거울 뉴런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뇌세포이다. 누군가가 하품을 하면 옆에 있는 사람들도 따라 하품을 하거나, 엄마가 찡그리고 있으면 아기는 엄마 표정을 보며 더 크게 우는데 이는 모두 거울 뉴런과 관련이 있다. 거울 뉴런 효과에 따르면 학생들의 무표정함은 분명 필자의 무표정함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럼 필자의 무표정함의 원천은 어디일까? 이 나라에서 정치한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겠다.
거울 뉴런은 특히 미소, 웃음, 행복, 사랑 등을 민감하게 감지한다고 한다. 거울 뉴런이 민감하게 감지하는 행복, 사랑 등의 공통점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 사회가 웃을 일이 많지 않는 사회가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웃자. 우리의 웃음으로 세상을 밝히자.
1년 365일 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안된다면 적어도 세상 어둠을 밝히는 성탄의 빛이 있는 12월만큼은 우리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12월 한 달만이라도 싸움을 멈추고, 시기, 질투, 미움 등의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우자. 만약 한 달이 욕심이라면 최소한 크리스마스가 있는 이번 주만이라도! 필자는 “당신이 웃으면, 세상도 따라 웃습니다.”라는 문장을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작은 손거울 하나를 그 옆에 놓았다. 거울 안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바꾸기 위해서! 이번 성탄 선물로 거울을 선물해봄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