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딸랑!`포항 죽도시장앞 국민은행 사거리에 구세군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성탄절을 앞둔 거리엔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추위를 이기지 못한 탓이다. 이렇듯 추운 연말이면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온정이 그리울 때다.
성경에서는 이웃을 사랑하자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장 12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 40절)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 역시 이웃사랑을 강조한다. 법구 비유경에서는 “곡식을 얻으려면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하고, 큰 부자가 되려면 보시를 행해야 하며, 장수하려면 대자비를 행해야 하고, 지혜를 얻으려면 배우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 네가지 일을 행해야 그 종류에 따라 결과를 얻을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 선조들 역시 이웃사랑을 재물 위에 두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재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릇 재물을 비밀스레 간직하는 것은 베품만 한 것이 없다. 내 재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흔적없이 사라질 재물이 받은 사람의 마음과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변치않는 보석이 된다.” 재물을 모으는 일보다 재물로 어려운 이웃을 도우는 것이 더 훌륭하고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돈과 권력, 명예를 원한다. 그러나 깊은 무의식은 나 자신을 초월하는 사랑, 합일, 공감, 소통, 유머, 아름다움, 신성함, 고요를 원한다. 그런 진실을 깨닫고 나면 세상살이에 조금은 초연해진다.
사십대가 된 어느 날, 세상사는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질까 고심하다 두 가지 진실(?)을 깨달았다. 첫번 째는 내가 상상하는 것 만큼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례를 들어보자. 여러분은 일주일 전에 만났던 친구가 입었던 옷을 기억하는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친구가 어떤 색상의 어떤 옷을 입었고, 머리 모양은 어땠는 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친구에 대해 잘 기억하지 못하는 만큼 그 친구 역시 나에 대해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생각만 하기에도 바쁘다. 남 걱정이나 비판도 알고보면 잠시뿐이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아주 잠깐 남 걱정 혹은 비판을 하다가 재빨리 자기 생각으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내 삶의 많은 시간을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 걱정하는 데 쓸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두번 째는 남을 위한다면서 하는 모든 행위들도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내 가족이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도 내 마음 깊이 들여다보면 가족이 있어서 따뜻한 나를 위한 것이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우는 것도 결국 내가 보고싶을 때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외로운 내 처지가 슬퍼서 우는 것이다. 자식이 잘 되길 바라면서 욕심껏 잘해주는 것도 결국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 중심의 관점에서 하는 일들이란 얘기다. 이런 두가지 사실을 마음깊이 새기고 나니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 크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남 눈치 보지않고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걱정할 시간에 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그냥 해버리자고 마음먹게 된 것이다.
또 내 가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닌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았는가로 측정돼야 한다고 믿게됐다. 행복이 자족에 있다면, 내가 충분히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어야 행복할 것이다. 내가 행복해야 내가 또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