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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권리에 대한 이야기

등록일 2015-12-11 02:01 게재일 2015-12-1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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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br /><br />논설위원
▲ 김진호 논설위원

“살아갈 권리와 마찬가지로 죽을 권리도 있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신이나 가족의 결정으로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 지난 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통과돼 입법화를 눈앞에 두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터져나온 반응들이다. 연명의료란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으로 임종기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말한다. 임종기 환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하는 `연명의료 결정법`은 찬성하는 주장도 많지만 반대의견도 적지않아 논란이 많았다. 사람들은 누구나`오래 살고싶다`는 욕망을 갖고있다. 그렇다 해도 삶의 끝자락에서 회복할 수 없는 병에 빠져 고통스런 삶이 반복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인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논란을 넘어 입법화되는 단계에 온 만큼 죽을 권리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그만큼 무르익은 셈이어서 죽음에 대한 여러 단상들을 떠올리게 된다.

에릭 시걸이 쓴 베스트 셀러 소설인 `러브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스물 다섯살에 죽은 여자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가 예뻤다고. 그리고 총명했다고. 그녀가 모차르트와 바흐를 사랑했다고. 그리고 비틀즈를 사랑했다고. 그리고 나를 사랑했다고.` 알베르 카뮈가 쓴 소설 `이방인`도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은 소설들은 첫 문장에 삶 혹은 죽음을 얘기한다. 특히 죽음은 두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상황이니 충격요법에 해당하는 소설적 장치다. 누구라도 인연맺은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인생의 허무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사람은 죽는다는 걸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무의식에서는 자신은 영원히 살 것 같다. 그러다 자신이나 친인의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 비로소 `우리 삶이 영원한 게 아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통 사람이 가장 먼저 경험하는 죽음은 대개 부모의 죽음이다. 여기서 넌센스 퀴즈 한 토막.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제일 서럽게 우는 사람은 효자와 불효자 가운데 누굴까? 정답은 불효자다. 정답 해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효자들은 살아계신 동안에 할 만큼 했기 때문에 울 일이 없단다. 부모가 아프면 따뜻한 밥이라도 한 번 더해 드리고 조금 더 웃어드리면 된다. 부모가 아프다고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하며 울면 부모도 마음이 불편하다. 내일 돌아가시더라도 오늘은 생글생글 웃어야 부모도 남은 시간을 웃다가 돌아가실 수 있다.

사실 나이 많은 부모가 죽는 것은 무척 아쉽고 안타깝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맨 정신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는 바로 자식이 부모에 앞서 갔을 때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이 미어질 수 밖에 없다. 자식을 부모의 가슴속에서 떠나 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그런 경우를 당하면 어쩌랴. 떠난 사람은 보내줘야 한다. 그저 `잘가라. 안녕`하고 보내줘야 한다.

이처럼 생사에 초연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법륜스님은 `삶과 죽음은 하나의 변화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 깨우침이 필요하다. 바닷가에 나가 해변에 몰아치는 파도를 보라.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또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러나 바다 전체를 보면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바닷물이 출렁거릴 뿐이다. 바다 전체를 보듯 인생을 관조해보자. 세상에서는 보이면 살았다고 하고, 안보이면 죽었다고 하고, 안보이다 보이면 태어났다고 한다. 세상에 실재하는 건 변화일 뿐이며 인식의 문제다.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당연한 변화다. 그걸 알면서도 변화를 괴로워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인간으로서 끝내 떨쳐내기 어려운 집착과 욕심때문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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