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벌거벗은 저 나무처럼 살게 하소서. 화려한 꽃으로 피어나도 자랑하지 않으며,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어도 들뜨지 않으며, 무성했던 잎들을 떨쳐버리고도 결코 외로워하지 않는, 그런 비움의 미학을 배우고 실천하게 하소서.
12월은 즐겁게 노래하는 저 새처럼 살게 하소서. 이름 모를 나무들이 먼저 손 내밀지 않아도, 떠도는 바람과 구름이 무심하게 지나쳐도, 여전히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는, 그런 소통의 미학을 배우고 실천하게 하소서.
12월은 하얗게 내려앉는 저 눈처럼 살게 하소서. 산꼭대기와 산골짜기들이 저마다 높이를 달리해도, 도시와 도시의 지붕들이 제 각각 모습을 견주어도, 어느덧 눈이 내려 세상을 오직 하얀색으로 만드는, 그런 용서의 미학을 배우고 실천하게 하소서.
12월은 따뜻하게 타오르는 저 화롯불처럼 살게 하소서. 이제 곧 마음이 추운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또 갈 곳 없는 영혼들이 거리를 헤매다 돌아올 때, 훨훨 타는 가슴으로 차디찬 세상을 단숨에 껴안는, 그런 사랑의 미학을 배우고 실천하게 하소서.”
일 년 열두 달 중에 12월만큼 만감이 교차하는 달도 없을 것이다. 끝자락에서 되돌아보면, 아쉽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몇 년 전, 아쉬움에 들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 시를 써서 몇 몇 지인들에게 보내니, 지인들은 감동적인 시라고 했다. 며칠 전, 그동안 써 온 시를 뒤적이다가 이 시를 다시 읽게 되었다. 이내 부끄러움과 함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4연으로 구성된 이 시의 어느 구석에 비움, 소통, 용서, 사랑이 있다는 말인가? 이 시의 어디에도 그런 숨결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카락이 쭈뼛 서면서, 또 얼굴이 달아오른다. 제목은 `12월의 기도`였는데, 시간을 지나서까지 울림을 주지 못하는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슴으로는커녕 머리만으로 쓴 시였기 때문인 것 같다.
지인들의 너그러움을 다시 존경하면서, 진정으로 12월엔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가. 정현종 시인처럼 `시를 썼으면/그걸 그냥 땅에 묻어두거나/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불쌍하도다 나여/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라며 꿋꿋하게 시를 발표하든지, 기형도 시인처럼 `나의 혼은 주인 없는 바다에서 일만 갈래 물살로 흘렀다`라며 시인의 시심을 노래하든지….
안도현 시인처럼 `연탄재 발로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호통을 치든지, 윤동주 시인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라며 마음의 거울을 닦고 또 닦든지…. 이도 저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어디에도 답은 없다. 희망만 있을 뿐. 지금과는 다른 대안적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자들이 말하는 희망. 새로운 세계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은 오직 우리가 희망하기를 멈출 때 뿐이라고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던 것 같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멈추지 않는 한 12월의 기도에 진정성이 서릴 것이고,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라는 희망…. 그가 또 말했다.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라고.